본문 바로가기

분류 전체보기2003

임계댁 임계댁 아침에 옷고름 풀다. 임계댁은 시집온 지 1년 만에 과부가 됐다. 자식도 없는 청상과부는 한눈 안 팔고 시부모를 모시고 10년을 살다가 한해걸이로 시부모가 이승을 하직, 삼년상을 치렀다. 탈상한 지 며칠 되지 않아 매파가 찾아왔다. “아직 서른도 안된 임계댁이 자식도 없이 홀로 한평생을 보내기엔 세월이 너무 길잖아.” 임계댁은 눈이 동그래져 “그래서요?” 하고 물었다. 한숨을 길게 쉰 매파가 목소리를 낮추고 얘기를 이어갔다. “아랫동네 홀아비 박초시가 임계댁 탈상할 날만 기다리고 있었네.” “나가세요!” 서릿발이 돋은 앙칼진 목소리로 임계댁이 소리치자 매파는 겁에 질려 허둥지둥 뒷걸음쳐 사라졌다. 임계댁은 늙은 청지기를 데리고 억척스럽게 논농사, 밭농사를 지으며 의젓하게 수절했다. 임계댁도 박초시.. 2021. 2. 7.
도둑을 잡다 젊은 나이에 과부된 민진사댁 마님, 잡혀온 도둑의 포승줄을 풀어 주고 술상까지 차리는데… 엊저녁에 온 눈이 발목까지 빠지는 이른 아침, 허리가 구부정한 늙은이가 어기적어기적 동헌 안마당에 들어서 사또를 직접 만나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이방 아래 졸개가 눈살을 찌푸리며 용건이 뭐냐고 묻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민 진사댁 행랑아범이라는 걸 알게 된 졸개가 이방한테 아뢰었다. 그러자 깜짝 놀란 이방이 아직도 수청 기생을 껴안고 있는 사또에게 달려갔다. 사또가 후다닥 일어나 동헌 안뜰로 내려가 민 진사댁 늙은 행랑아범의 두손을 잡았다. “간밤 삼경녘에 도둑이 들어 마님께서 하도 놀라 청심환을 드시고도 아직 일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허~ 이럴 수가.” 사또가 이방·형방과 포졸들을 데리고 손수 눈밭을 헤쳐.. 2021. 2. 7.
흔들리는 너와집 과거시험에 아홉번 낙방한 송백기 용소에 몸던지려는 찰나에 어디선가 풍덩 소리가… 달이 네개다. 검푸른 밤하늘에 하나, 용소에 또 하나, 백기의 두눈에 고인 눈물 속에도 달이 하나씩 어른거린다. ‘스물두살 송백기는 이렇게 생을 마감하는구나. 친구들과 어울려 술 한잔 못 마셔보고, 여자 손목 한번 못 만져보고, 이렇게….’ 백기가 용소에 뛰어들려는 순간 ‘풍덩’ 소리가 났다. 깜짝 놀라 눈물을 닦고 건너편을 봤더니 누군가 용소에 먼저 뛰어들어 휘도는 물살에 감겨 옷자락이 맴도는 게 아닌가. 백기는 자신도 모르게 뛰어들어 옷자락을 붙잡고 소용돌이와 사투를 벌였다. 죽을 힘을 다해 나뭇가지를 잡아 용소 밖으로 빠져 나와 물 속으로 뛰어든 사람을 보니 산발한 여인이다. 입에 입을 대고 숨을 불어넣고 가슴을 짓눌렀.. 2021. 2. 7.
다 싫은 날/김용택 다 싫은 날 김용택 꿈도 싫소. 꽃도 나는 싫소. 사랑도 시도 점심밥도 다 싫소. 팽팽하게 휘어진 강 끝에 떨고 서있는 나무의 나날들이여! 나의 시여! 택도 없는 결기여! 나비여, 흰 날개여! 제발, 이제 그만두자. 날씨는 어제와 달리 오늘 다소 쌀쌀하였다. 2021. 2. 7.
자업자득 구두쇠 주인이 종에게 돈은 주지 않고 빈 술병을 주면서 말했습니다. "술을 사오너라." 그러자 종이 말했습니다. "주인님! 돈도 안 주시면서 어떻게 술을 사옵니까?" 주인이 말했습니다. "돈 주고 술을 사오는 것이야 누구는 못하니? 돈 없이 술을 사오는 것이 비범한 것이지." 종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빈 술병을 가지고 나갔습니다. 얼마 후 종은 빈 술병을 가지고 돌아와서 주인에게 내밀었습니다. "빈 술병으로 어떻게 술을 마시니?" 그때 종이 말했습니다. "술을 가지고 술 마시는 것이야 누구는 못마십니까, 빈 술병 으로 술을 마셔야 비범한 것이지요." 이 이야기는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인생은 주는 대로 받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납니다. 그것이 자연의 법칙입니다.. 2021. 2. 5.
덮어주는 삶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화창한 날에 기분 좋게 언덕을 올라가던 소년은 길에 튀어나와 있던 돌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런 돌덩이가 왜 사람들 다니는 길에 있지?” 소년은 삽으로 돌부리를 캐내기 시작했습니다. 파헤치자 점점 돌의 크기가 드러났습니다. 땅 위에 보이는 돌은 사실 큰 바위의 일부였던 것입니다. 소년은 놀랐지만 결심했습니다. “다시는 다른 사람들이 돌부리에 걸리지 않도록 파내겠어!” 소년은 분한 마음 반, 정의감 반으로 거대한 돌에 달려 들었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습니다. 소년은 삽을 놓았습니다. “안 되겠다, 포기하자.” 소년은 파놓았던 흙으로 돌이 있던 자리를 덮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소년이 걸려 넘어졌던 돌부리도 흙에 덮여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소년은 중얼거렸습니다... 2021. 2.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