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이야기97 극락 집안 살림에 동네일까지 잘해 마을의 보물덩어리인 몽촌댁 바위에서 떨어져 정신을 잃는데… 몽촌댁은 동네의 보물덩어리다. 시부모 살아생전에는 얼마나 잘 모셨는지 단옷날 고을 원님으로부터 효부상으로 비단 세필을 받기도 했다. 또 동네일이라면 집안 살림을 접어두고라도 앞장섰다. 핏줄도 아닌데 혼자 사는 할머니가 딱하다며 죽을 쒀 나르고 가마솥에 물을 한솥 데워 목욕시키는 것은 다반사다. 동네로 들어오는 외나무다리가 흔들린다고 남편과 둘이서 온종일 말뚝을 박는가 하면 남의 집 길흉사엔 새벽부터 밤늦도록 제집 큰일처럼 척척 일을 처리했다. 그뿐 아니라 일 잘하면 박색이라는데 몽촌댁은 채홍사가 봤다면 궁궐로 이끌려 갈 만큼 천하일색이었다. 남편 박 서방도 마음씨가 무던한데다 육척 장신에 .. 2022. 1. 16. 육희(六喜) 늙은 기생이 애비가 누군지도 모르는 딸아이 하나를 데리고 조그만 주막을 꾸려 가고 있었다. 주막집 구석방엔 높다란 유건을 쓰고 수염을 길게 기른 자칭 도사가 점도 치고 사주팔자도 봐주며 장기 투숙하고 있었다. 차림새를 도사연하느라 나이가 들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십대 중반에 지나지 않는 건장한 남정네다. 가뭄에 콩 나듯이 띄엄띄엄 아낙네들이 점을 보러 오고 술에 취한 손님들이 즉흥적으로 사주팔자를 봐 그럭저럭 푼돈을 벌지만, 주막집 숙식비로 주모에게 돈 주는 법이 없다. 젊은 시절엔 꽤 이름난 기생으로 이 남자 저 남자 품에서 콧대 높게 놀았지만, 쉰이 넘자 서리 맞은 호박꽃이 되어 탁배기를 거르고 국밥을 마는 처량한 신세가 된 주모는 가끔씩 온몸에 벌레가 기듯 근지러운 밤이면 열일곱 딸아이가.. 2022. 1. 16. 죽마고우 아름드리 떡갈나무 잎이 우수수 떨어져 이리저리 바람에 쏠려 뒹굴고 한가닥 남았던 시월상달 짧은 햇살이 길게 누워 버린 스산한 음풍나루터 외딴 주막에 나그네 하나가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찾아들었다. 오가는 길손도 없어 적적하던 주모가 반갑게 나그네를 맞았다. 눌러쓴 갓을 올리며 “하룻밤 자고 가리다” 나그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옥분아, 객방에 군불을 지펴라” 주모가 소리쳤다. 저녁 준비를 할 동안 나그네는 마루에 걸터앉아 탁배기를 시켰다. 소반에 간단한 밑반찬과 함께 탁배기 한호리병을 얹어 마루에 놓자 “주모, 여기 잔 하나 더 놓고 젓가락도 하나 더 놓으시오” 했다. 주모가 배시시 웃으며 “또 한분이 뒤따라오시는가 뵈” 하자, 나그네는 굵직한 목소리로 “아니오. 내 일행은 없소이다.” “호호호호... 2022. 1. 16. 운명의 윷을 던지다 가난한 집안의 셋째딸 언년이 김대감집 딸 몸종으로 들어가 결혼하자고 협박하는 산적두목에 아씨를 대신해 시집 가게 되는데… 강원 강릉에 딸 일곱 아들 하나를 둔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의 셋째 딸 언년이는 입 하나 덜겠다고 열두살 때 김 대감 댁 몸종으로 들어갔다. 귀염상에 눈치 빠른 언년이는 두살 위인 김 대감 외동딸의 몸종이 되어 입속의 혀처럼 아씨를 받들었다. 네해가 지나 아씨가 한양의 홍 판서 아들에게 시집을 가자 언년이도 몸종으로 따라갔다. 이듬해 친정 생각으로 아씨가 눈물을 보이자 신랑은 말을 타고 아씨는 가마를 타고 신행길에 올랐다. 말고삐를 잡고 등짐을 지고 걸어가는 하인들 틈에서 언년이의 발걸음은 구름 위를 걷는 것만 같았다. 몇 날 며칠을 걸어 오대산 허리를 돌아 진부 주막집에서 하룻밤을 묵.. 2021. 11. 20. 다시 찾은 신랑 찢어지게 가난한 집 딸 열일곱 옥분이가 혼수 하나 가져가지 않는 조건에 재취로 한살 아래 신랑에게 시집갔다. 첫 신부가 시어머니 등쌀에 쫓겨났다는 걸 알고 옥분이는 시어머니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네 어머님 하고 발딱 일어나 우물 속에 빠지라면 빠지는 시늉까지 할 정도로 시어머니 입속의 혀처럼 놀았다. 문제는 그게 아니라 엉뚱한 데 있었다. 저녁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한 뒤 신방에 들어가 눕자 신랑이 다가와 옷고름을 풀었다. 발가벗은 신랑 신부가 꼭 껴안고 온몸이 달아올라 막 합환을 하려는 참에 바로 문밖에서 아흠아흠 헛기침을 한 시어머니가 아가 물 한사발 떠 오너라. 신랑 신부가 한몸이 된 이불 속으로 찬물 한동이를 쏟아붓는 꼴이 됐다. 네 어머님. 후다닥 일어나 치마저고리를 걸치고 부엌으로 가 물 한사발.. 2021. 11. 20. 팔전구기 백면서생 하원은 과거 시험지만 들면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린다. 수많은 나날 그렇게 공부해서 차곡차곡 머릿속에 박아 놓았던 그 많은 글들은 꼭 꺼내려 할 때 왜 모두 날아가 버리는가! 그 누가 칠전팔기라 했던가. 여덟번째 과거에 또 낙방을 하고 그놈의 지긋지긋한 공부를 때려 치우기로 작정했다. 낙향하면 한양에 언제 다시 와 보랴 싶어 여기저기 개성 갔다가 제물포까지 구경하고 친지들 얼굴을 피하려고 설날에도 객지에서 머문 뒤 고향 안동으로 발걸음을 뗐다. 단양팔경을 구경하고 죽령을 넘는데, 눈발이 휘날리더니 이내 폭설로 변해 발길은 허리춤까지 빠지고 시야는 댓걸음 앞이 안 보인다. 기운도 떨어지는데다 길을 잃어 허우적거리다 춥고 배고파 허리춤에 찬 표주박을 풀어 콸콸 약주를 마시고 나니 정신이 몽롱해졌다. .. 2021. 11. 20. 이전 1 2 3 4 ··· 1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