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2003 흑룡의 여의주 권대감의 딸이 세도가 민대감의 삼대독자에게 시집가던 날 온 장안이 떠들썩했다. 세상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으며 시집을 간 신부는 부귀영화로 가득 찬 시댁이 밤이나 낮이나 웃음뿐인 줄 알았는데 근심 걱정도 있다는 걸 알았다. 신랑이 결혼 전에 벌써 일곱번이나 과거에 낙방한 것이다. 설상가상 혼인한 지 1년이 가까워지자 또 하나의 걱정거리가 생겼다. 시댁 식구 모두가 새신부 배를 뚫어지게 보는데 아직 입덧조차 없으니 근심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손발이 찬 신랑이 공부한답시고 별당에 독거하며 가뭄에 콩 나듯이 신방에 오지만 신부의 옷을 벗기고 껍죽껍죽하다가 도망치듯이 별당으로 돌아가곤 해 신부는 자신의 배 속에 아기가 들어서지 않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설 준비에 집안이 부산하다고 신랑은 책보따리를 싸 들고.. 2021. 11. 20. 미음 사발 빈털터리 건달 녀석이 어디 술이나 한잔 얻어 마실까 하여 할 일 없이 저잣거리를 기웃거리다가 약재상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싸구려 한약재를 한자루 외상으로 사서 둘러매고 집으로 가 한약방 시동으로 있을 적의 경험을 되살려 환약을 만들었다. 그가 만든 환약엔 넣어서는 안 될 성분이 들었으니 바로 아편이다. 건달 녀석은 수염을 기르고 갓집에서 도사들이 쓰는 높은 유건을 맞춰 쓰고 검은 도포를 입고 오동나무 상자에 환약을 넣어 집을 나섰다. 산 넘고 개울 건너 이 마을 저 마을 지나며 커다란 기와집만 보면 들어가 주인 영감을 만나 화려한 입심으로 사기를 쳤다. 해구신 우황 명경주사 산삼을 주원료로 한 정력제라며 효력이 없으면 돈을 안 받겠다고 큰소리쳤다. 건달은 그 집 사랑방에서 자고 영감님은 안방으로 들어.. 2021. 11. 20. 황룡을 품다 조실부모하고 초가삼간에 남은 사람은 열두살짜리 혈혈단신 계집애 옹천이뿐이다. 동네 부자인 오참봉네 안방마님이 불쌍히 여겨 자기 집 부엌에서 찬모를 도와 일하라는 호의를 옹천이는 단호히 거절했다. 이웃 여자들이 입던 옷을 가져다줘도 자기는 거지가 아니라며 받지 않았다. 옹천이는 제 아비 어미가 목줄을 달았던 다섯마지기 밭뙈기를 혼자서 일궜다. 보리 심고 콩 심어 추수하고, 겨울이면 큰일 치르는 집에 가서 허드렛일을 해 주고 때로는 삯바느질도 해 주며 보릿고개에도 밥을 굶지 않았다. 5년이 지난 열일곱살 땐 비록 화전 밭뙈기지만 농토를 늘렸다. 나이를 먹을수록 힘세고 능숙한 농부가 되어 매년 겨울이면 한마지기씩 논밭을 샀다. 바쁘게 일할 땐 거울 볼 사이도 없었지만 혼기가 차고 먹고 살만해지니 옹천이에게 바.. 2021. 11. 20. 운명(運命)은 움직이는 것 요즘 가톨릭신학원에서 ‘주역(周易)’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흔히 점치는 책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주역』이라는 책은, 변화무쌍한 세상 속에서 사람들이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이야기하는 유가철학의 경전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정해진 운명이 있다고 믿고,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알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정해진 미래라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 앞에는 여러 갈래의 길이 펼쳐져 있고, 어느 길로 갈 것인지는 결국 내가 선택하는 것이지요. 같은 어려움이 닥쳐도 어떤 사람은 절망하며 주저앉아 삶을 포기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전화위복의 기회로 여겨 씩씩하게 맞서 나아갑니다. 내 앞에 펼쳐진 세상은 시시각각 변하며 그것이 나의 삶에 수많은 영향을 주지만, 그 세상을 어떤 눈으로 보고, 어.. 2021. 11. 9. 애꾸가 내일을 보다 흉년이 들어도 지독한 가뭄에도 천석꾼 황첨지는 빙긋 손윗사람 하대하는 안하무인이지만, 반미치광이 백가는 깍듯이 모셔, 어느날 동학란 중 도망쳤다가 붙잡혀 광장에 꿇어앉아있는데… 흉년이 들면 농사꾼들은 피가 바짝바짝 마르지만 천석꾼 부자 황 첨지는 빙긋이 웃는다. 지난해는 지독한 가뭄으로 보리는 싹도 나지 않았고 콩은 겨우 난 싹이 메말라 고개를 꺾었다. 논은 거북 등처럼 갈라져 모가 하얗게 쪼그라들었다. 황 첨지네 논밭이라고 비가 뿌렸을 턱이 없지만 그는 희희낙락했다. 그 전해에 추수해놓은 보리섬 콩섬 나락가마가 곳간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황 첨지는 곡식을 내다 팔지 않는다. 기다리면 더 큰 횡재수가 줄줄이 엮여 들어온다. 보릿고개까지 갈 것도 없이 동짓달에 벌써 양식이 떨어진 집이 속.. 2021. 11. 3. 장맛비 똑소리 나는 이초시의 외동딸 ‘득순’ 신랑 될 ‘구식’이 공부하는 절 찾았다 집에오는 길 비 쏟아져 다시 돌아가 첫날밤 치른 득순, 뭔가 허망한데… 이초시의 외동딸 득순이를 동네 사람들은 똑순이라 불렀다. “아지매, 콩 한되 주이소.” “와?” “아제가 우리 소를 한나절 부려먹더니 소가 힘이 쪽 빠져갖고 소죽솥에 콩 한되 넣어줘야 되겠심더.” 일곱살 똑순이는 부모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기어이 콩 한되를 받아와서 소죽솥에 넣었다. 똑순이는 동네 서당에 다니는 유일한 여자아이지만 남자 학동들 다 합쳐도 똑순이 하나만 못했다. “모두 불알 떼서 누렁이 줘 버리거라.” 훈장님이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다. 김구식이가 그나마 훈장님한테 회초리를 덜 맞는 편이지만 똑순이가 들어갈 때 그는 아직 에 매달려 있다. 구식이.. 2021. 11. 3. 이전 1 ··· 28 29 30 31 32 33 34 ··· 33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