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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이야기97

초립동 왕이 화가 났다. 인재를 골라 뽑아 평양감사로 내려보내도 보내는 족족 주색에 빠져 정사를 강 건너 불 보듯 하니 평양감영의 기강은 흐트러지고 백성들의 원성은 하늘을 찔렀다. 평양감사를 홀리는 여우는 부벽관의 홍엽이라는 기생이다. 왕은 믿을 신하가 없어 참판으로 있는 부마(왕의 사위)를 암행어사 로 임명, 불문곡직 국기를 문란케 한 기생 홍엽의 목을 베라는 명과 함께 평양으로 내려보냈다. 몇날 며칠 말을 타고 와 평양이 가 까워졌을 때 늦가을 토끼 꼬리만한 날이 저물었다. 부마는 떨어진 갓에 기운 두루마기 차림으로 변장하고 고갯마루의 조그만 주막에 들어가 하룻밤 유숙하기를 청해 객방에 보따리를 풀었다. 뜨뜻한 객방에서 쇠고기국에 밥을 말아 먹고 막걸리를 한잔 마시고 나니 온몸이 쑤셨다. 상을 들고 나가며 .. 2021. 2. 23.
양자 온 세상이 깊은 잠에 빠진 적막강산. 오줌을 누러 다리 밑 움막을 나온 거지 아이의 눈에 개울 얼음장 위 떨어진 보따리 하나가 희미하게 들어왔다. 다리 위를 지나가던 소달구지에서 쌀가마라도 떨어진 걸까, 다가갔더니 이게 무엇이냐! 술 냄새가 진동하는 걸 보니 취객이 다리에서 떨어진 것이다. 북풍한설은 몰아치는데 금방 떨어진 게 아닌 듯 옹크리고 모로 누워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얼굴을 만져보니 돌처럼 차가웠다. 움막으로 달려가 할배를 깨웠다. 할배가 그 취객을 움막으로 끌고 들어가 모닥불을 피우고 팔다리를 주물렀다. 희끄무레 동녘이 밝아올 때야 취객이 눈을 떴다. “우리 막동이 아니었으면 당신은 얼어 죽었소. 어찌 젊은 사람이 술을 그렇게….” 할배가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고∼고∼고맙습니다.” 젊.. 2021. 2. 12.
파락호 허진사 파락호 허진사 동네 훈장 세상뜨자 그 부인을 탐하는데… 허 진사는 선대(先代)로부터 물려받은 그 많은 문전옥답(門前沃畓)을 다 팔아먹고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채 색주(色酒) 집으로 노름판으로 떠돌아다니는 한심한 파락호다. 부인은 진작에 아이 둘을 데리고 친정으로 가버려 허 진사 혼자 사니, 끼니 건너뛰기를 밥먹듯이 해 비쩍 마른 손가락이 더 길어졌다. 그런 허 진사가 요 며칠 사이 바빠졌다. 동네 서당 훈장님이 이승을 하직해 상주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생전에 별로 친하지도 않았는데 죽고 나자 빈소를 차리기도 전에 달려와 땅을 치며 통곡하는데 “아이고 형님, 이게 어인 일이오~ 아이고 아이고~.” 일가친척도 없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훈장 부인은 허 진사에게 매달렸다. “생전에 형님께서 큰일이 .. 2021. 2. 7.
쌀도둑 김초시는 과거만 보면 떨어져 한양 구경이나 하고 내려오지만 도대체 기가 죽는 법이 없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마누라더러 “닭 한마리 잡아서 백숙해 올리지 않고 뭘하냐”며 큰 소리를 친다. 머슴도 없이 김초시 마누라는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모심고 피 뽑고 나락 베고 혼자서 농사를 다 짓는다. 논에서 일을 하다가도 점심 때가 되면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와 김초시 점심상을 차려주고 다시 논으로 종종걸음을 친다. 김초시는 식사 때를 조금이라도 넘기면 “여편네가 지아비를 굶겨죽이기로 작정했지” 라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말끝마다 “무식한 예편네”라고 무시한다. 어느 봄날, 온종일 밭에 나가 일하고 들어와 안방에서 바느질을 하는데 사랑방에서 글을 읽던 김초시가 들어와 호롱불을 후~ 꺼버리고 마누라를 쓰러트렸다. 그때 .. 2021. 2. 7.
임계댁 임계댁 아침에 옷고름 풀다. 임계댁은 시집온 지 1년 만에 과부가 됐다. 자식도 없는 청상과부는 한눈 안 팔고 시부모를 모시고 10년을 살다가 한해걸이로 시부모가 이승을 하직, 삼년상을 치렀다. 탈상한 지 며칠 되지 않아 매파가 찾아왔다. “아직 서른도 안된 임계댁이 자식도 없이 홀로 한평생을 보내기엔 세월이 너무 길잖아.” 임계댁은 눈이 동그래져 “그래서요?” 하고 물었다. 한숨을 길게 쉰 매파가 목소리를 낮추고 얘기를 이어갔다. “아랫동네 홀아비 박초시가 임계댁 탈상할 날만 기다리고 있었네.” “나가세요!” 서릿발이 돋은 앙칼진 목소리로 임계댁이 소리치자 매파는 겁에 질려 허둥지둥 뒷걸음쳐 사라졌다. 임계댁은 늙은 청지기를 데리고 억척스럽게 논농사, 밭농사를 지으며 의젓하게 수절했다. 임계댁도 박초시.. 2021. 2. 7.
도둑을 잡다 젊은 나이에 과부된 민진사댁 마님, 잡혀온 도둑의 포승줄을 풀어 주고 술상까지 차리는데… 엊저녁에 온 눈이 발목까지 빠지는 이른 아침, 허리가 구부정한 늙은이가 어기적어기적 동헌 안마당에 들어서 사또를 직접 만나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이방 아래 졸개가 눈살을 찌푸리며 용건이 뭐냐고 묻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민 진사댁 행랑아범이라는 걸 알게 된 졸개가 이방한테 아뢰었다. 그러자 깜짝 놀란 이방이 아직도 수청 기생을 껴안고 있는 사또에게 달려갔다. 사또가 후다닥 일어나 동헌 안뜰로 내려가 민 진사댁 늙은 행랑아범의 두손을 잡았다. “간밤 삼경녘에 도둑이 들어 마님께서 하도 놀라 청심환을 드시고도 아직 일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허~ 이럴 수가.” 사또가 이방·형방과 포졸들을 데리고 손수 눈밭을 헤쳐.. 2021. 2.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