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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이야기97

산골짝 외딴집 한양가던 선비 한밤중 산길 헤매다 혼자 사는 과부 집에서 보내기로 밥 얻어 먹고 잠을 청하려는데. 부엌에서 나는 물소리, 방에 누웠지만 마음은 이미… 상강(霜降)이 지나자 밤공기가 싸늘해졌다. 선비는 발길을 재촉했지만 가도 가도 시커먼 산골짝엔 불빛이라곤 보이지 않는다. 식은땀을 닦으며 산허리를 돌자 가느다란 불빛이 깜박거린다. 이제는 살았구나. 선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내를 건너 갈대밭을 헤집고 사립문까지 다다랐다. 주인장 계시오? 문 좀 열어주시오. 선비의 고함에 안방 문이 열리고 아낙이 나왔다. 이 밤중에 누구를 찾으러 오셨는지요? 한양 가는 길손입니다. 해 떨어지기 전에 단양에 닿을 줄 알았는데 산속만 헤매다가 불빛을 보고 불고염치…. 길을 잘못 들었군요. 이 길로 삼십리만 가면 매포에 닿을 .. 2021. 11. 3.
멸 정 ( 滅 情 ) ㅡ 정든 사람, 정든 물건과 작별하는 일이 멸정(滅情)입니다 ㅡ 젊었을 적부터 "이 진사"는 , 부인 인 "여주 댁"을 끔찍이도 생각해, 우물에서 손수 물을 길어다가, 부엌으로 날라다 주고, 동지 섣달이면, 얼음장을 깨고, 빨래하는 부인이 안쓰러워 개울 옆에 솥을 걸고, 장작불을 지펴서, 물을 데웠다. 봄이 되면 아내"여주 댁"이 좋아하는 '곰취'를 뜯으러 깊은 산을 헤매고, "봉선화" 모종을 구해다가, 담 밑에 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장날이 되면 "이 진사"는 "여주 댁"이 좋아하는 '검은 깨엿'을 가장 먼저 사서 조끼 주머니에 넣었다. '여주 댁'은 동네 여인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단 하루라도 '여주 댁'처럼 살아봤으면 한이 없겠네.” “'여주 댁'은 무슨 복을 타고나서 저런 서방을 만났.. 2021. 8. 3.
범인찾기 가난한 늙은이가 외동아들의 병을 고치려고 몇뙈기 안되는 밭을 팔아 강원도 정선 땅으로 산삼을 사러 가다가 원주 주막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됐다. 하루 종일 70리를 걸어와 어지간히 피곤했던지 저녁 수저를 놓자마자 객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는 엽전 꾸러미를 품에 안고 모로 누워 금방 코를 골았다. 마당에서는 하룻밤 묵고 갈 객들이 모깃불을 피워 놓고 떠들썩하게 막걸리판을 벌였다. 소장수, 보부상, 노름꾼, 심부름 가는 마당쇠, 땅꾼, 소금장수가 어울려 대작을 하다가 누군가 툇마루에 걸터앉은 이에게 소리쳤다. “스님, 곡차 한잔 하시지요.” 그는 기다렸다는 듯 망설임 없이 성큼 내려와 막걸리 잔을 받아 단숨에 비우더니 주모를 불러 막걸리 반말을 샀다. 아무리 봐도 승려 복장을 한 산적이었다. 술판은 삼경이 가.. 2021. 7. 26.
부부 간통 공갈단 어수룩한 장사꾼이 당나귀 세마리를 몰고 몇날 며칠을 걸어 법성포에 다다라 저잣거리 주막에 짐을 풀었다. 이튿날 날이 새면 굴비와 멸치를 사서 바리 바리 나귀 등에 싣고 영월로 돌아갈 참이다. 쇠고기국밥에 막걸리 한호리병을 비우고 나니 초저녁부터 눈꺼풀에 납덩어리를 매달았는지 졸음이 쏟아졌다. 방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전대는 단봇짐 에 넣어 베개처럼 베고 잠이 들었는데, 너무 더워 잠이 깨고 보니 엄동설한도 아닌데 군불을 얼마나 지폈는지 방바닥이 설설 끓었다. 들창도 없는 방이라 장사꾼은 하는 수 없이 방문을 열고 윗도리를 훌렁 벗은 채 또다시 잠이 들었다. 얼마나 밤이 깊었나. 이상한 낌새에 잠을 깨니, 아니 이럴 수가. 웬 여인이 장사꾼의 팔베개를 베고 누워 있는 게 아닌가. 다른 손으로 더듬어 보니.. 2021. 7. 24.
황토 개울물 아버님의 묘소를 다녀온 이판윤 그날 밤 어머니와 함께 또 다른 산소를 찾아가 절을 올리는데 서른셋 젊은 나이에 판윤 (조선시대 한성부의 으뜸 벼슬)으로 봉직하는 이서붕이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왔다. 사또와 육방관속이 마중 나와 떠들썩해질까 봐 어둠살이 내릴 때 평상복 차림으로 말고삐를 잡은 하인 한 사람만 데리고 고향집에 들어갔다. 도착하자마자 홀로 지내시는 모친에게 큰절을 올렸다. “바쁜 공무를 접어두고 어떻게 하경했는고?” “어머님 문안도 드리고 아버님 묘소도 찾으려고 윤허를 받아 내려왔습니다.” 병풍을 등 뒤로 보료에 꼿꼿이 앉아 계시지만 어머니 얼굴의 주름은 더 늘었고, 머리엔 서리가 하얗게 내려앉았다. 어머니는 찬모를 제쳐두고 손수 부엌에 나가 아들이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호박잎을 찌고 강된장을 .. 2021. 7. 24.
변태 과부 인기척에 잠이 깬 황과부가 “누, 누, 누구요?” 이를 다닥다닥 부딪치며 벌벌 떨자 “나는 도적이다. 꼼짝 말고 이불 덮어쓰고 있으렷다.” 일부러 목소리를 걸걸하게 깔지만 어딘가 귀에 익은 음성 이다. 도둑은 깜깜한 방에서 장롱을 뒤지 다가 황과부를 밑에 깐 채 다락을 열고 더듬기 시작했다. 황과부는 그 상황에서 도 정신을 차려 머리맡의 바느질 고리짝 에서 가위를 집어 들고 도둑의 옷섶 끝 자락을 몰래 삭둑 잘라냈다. 도둑은 여기저기 뒤져도 별것이 없자 황과부를 흔들었다. “네년이 꽂고 다니던 금비녀는 어디 있는겨?” “여, 여, 여기.” 황과부가 비녀를 건네주자 조끼 주머니에 넣고 방을 나갈 제 꼬끼요 새벽닭이 울었다. 처마 밑에서 짚신을 신으려던 도둑이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이거 큰일 났네.” 그.. 2021. 7.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