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이야기97 출가외인 고 진사 시집간 맏딸 집에 가 섭섭한 대접 받고는 화를 꾹 참으며 나오는데… 맏딸 부친 부고 소식 듣고 대성통곡 하더니 친정집으로 점잖은 고 진사는 평생 화내거나 다투는 일이 없었지만 이번만은 오장육부가 뒤집혔다. 겨울이 되자 해소천식이 심해진 고 진사 는 사십리 밖 황 의원을 찾아가 약 한첩 지어 집으로 가다가 문득 딸 생각이 나서 발길을 돌렸다. 십리만 더 가면 재작년에 시집간 맏딸 집이다. 오랜만에 딸도 보고 사돈댁 살아가는 모습도 볼 겸 고개 넘고 물 건너 막실 맏딸 집으로 한걸음에 내달았다. 절구를 찧던 딸이 눈이 왕방울만 해져서 “아버지, 어인 일로…” 하고 달려나온다. 바깥사돈도 사랑방에서 나와 고 진사의 두손을 잡는다. “이렇게 불쑥 찾아뵈어 죄송합니다, 사돈 어른.” “별말씀을…. 어서 .. 2021. 11. 20. 흑룡의 여의주 권대감의 딸이 세도가 민대감의 삼대독자에게 시집가던 날 온 장안이 떠들썩했다. 세상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으며 시집을 간 신부는 부귀영화로 가득 찬 시댁이 밤이나 낮이나 웃음뿐인 줄 알았는데 근심 걱정도 있다는 걸 알았다. 신랑이 결혼 전에 벌써 일곱번이나 과거에 낙방한 것이다. 설상가상 혼인한 지 1년이 가까워지자 또 하나의 걱정거리가 생겼다. 시댁 식구 모두가 새신부 배를 뚫어지게 보는데 아직 입덧조차 없으니 근심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손발이 찬 신랑이 공부한답시고 별당에 독거하며 가뭄에 콩 나듯이 신방에 오지만 신부의 옷을 벗기고 껍죽껍죽하다가 도망치듯이 별당으로 돌아가곤 해 신부는 자신의 배 속에 아기가 들어서지 않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설 준비에 집안이 부산하다고 신랑은 책보따리를 싸 들고.. 2021. 11. 20. 미음 사발 빈털터리 건달 녀석이 어디 술이나 한잔 얻어 마실까 하여 할 일 없이 저잣거리를 기웃거리다가 약재상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싸구려 한약재를 한자루 외상으로 사서 둘러매고 집으로 가 한약방 시동으로 있을 적의 경험을 되살려 환약을 만들었다. 그가 만든 환약엔 넣어서는 안 될 성분이 들었으니 바로 아편이다. 건달 녀석은 수염을 기르고 갓집에서 도사들이 쓰는 높은 유건을 맞춰 쓰고 검은 도포를 입고 오동나무 상자에 환약을 넣어 집을 나섰다. 산 넘고 개울 건너 이 마을 저 마을 지나며 커다란 기와집만 보면 들어가 주인 영감을 만나 화려한 입심으로 사기를 쳤다. 해구신 우황 명경주사 산삼을 주원료로 한 정력제라며 효력이 없으면 돈을 안 받겠다고 큰소리쳤다. 건달은 그 집 사랑방에서 자고 영감님은 안방으로 들어.. 2021. 11. 20. 황룡을 품다 조실부모하고 초가삼간에 남은 사람은 열두살짜리 혈혈단신 계집애 옹천이뿐이다. 동네 부자인 오참봉네 안방마님이 불쌍히 여겨 자기 집 부엌에서 찬모를 도와 일하라는 호의를 옹천이는 단호히 거절했다. 이웃 여자들이 입던 옷을 가져다줘도 자기는 거지가 아니라며 받지 않았다. 옹천이는 제 아비 어미가 목줄을 달았던 다섯마지기 밭뙈기를 혼자서 일궜다. 보리 심고 콩 심어 추수하고, 겨울이면 큰일 치르는 집에 가서 허드렛일을 해 주고 때로는 삯바느질도 해 주며 보릿고개에도 밥을 굶지 않았다. 5년이 지난 열일곱살 땐 비록 화전 밭뙈기지만 농토를 늘렸다. 나이를 먹을수록 힘세고 능숙한 농부가 되어 매년 겨울이면 한마지기씩 논밭을 샀다. 바쁘게 일할 땐 거울 볼 사이도 없었지만 혼기가 차고 먹고 살만해지니 옹천이에게 바.. 2021. 11. 20. 애꾸가 내일을 보다 흉년이 들어도 지독한 가뭄에도 천석꾼 황첨지는 빙긋 손윗사람 하대하는 안하무인이지만, 반미치광이 백가는 깍듯이 모셔, 어느날 동학란 중 도망쳤다가 붙잡혀 광장에 꿇어앉아있는데… 흉년이 들면 농사꾼들은 피가 바짝바짝 마르지만 천석꾼 부자 황 첨지는 빙긋이 웃는다. 지난해는 지독한 가뭄으로 보리는 싹도 나지 않았고 콩은 겨우 난 싹이 메말라 고개를 꺾었다. 논은 거북 등처럼 갈라져 모가 하얗게 쪼그라들었다. 황 첨지네 논밭이라고 비가 뿌렸을 턱이 없지만 그는 희희낙락했다. 그 전해에 추수해놓은 보리섬 콩섬 나락가마가 곳간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황 첨지는 곡식을 내다 팔지 않는다. 기다리면 더 큰 횡재수가 줄줄이 엮여 들어온다. 보릿고개까지 갈 것도 없이 동짓달에 벌써 양식이 떨어진 집이 속.. 2021. 11. 3. 장맛비 똑소리 나는 이초시의 외동딸 ‘득순’ 신랑 될 ‘구식’이 공부하는 절 찾았다 집에오는 길 비 쏟아져 다시 돌아가 첫날밤 치른 득순, 뭔가 허망한데… 이초시의 외동딸 득순이를 동네 사람들은 똑순이라 불렀다. “아지매, 콩 한되 주이소.” “와?” “아제가 우리 소를 한나절 부려먹더니 소가 힘이 쪽 빠져갖고 소죽솥에 콩 한되 넣어줘야 되겠심더.” 일곱살 똑순이는 부모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기어이 콩 한되를 받아와서 소죽솥에 넣었다. 똑순이는 동네 서당에 다니는 유일한 여자아이지만 남자 학동들 다 합쳐도 똑순이 하나만 못했다. “모두 불알 떼서 누렁이 줘 버리거라.” 훈장님이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다. 김구식이가 그나마 훈장님한테 회초리를 덜 맞는 편이지만 똑순이가 들어갈 때 그는 아직 에 매달려 있다. 구식이.. 2021. 11. 3. 이전 1 2 3 4 5 ··· 1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