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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이야기

죽마고우

by 진밭골 2022. 1. 16.

아름드리 떡갈나무 잎이 우수수 떨어져 이리저리 바람에 쏠려 뒹굴고 한가닥 남았던 시월상달 짧은 햇살이 길게 누워 버린 스산한 음풍나루터 외딴 주막에 나그네 하나가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찾아들었다. 오가는 길손도 없어 적적하던 주모가 반갑게 나그네를 맞았다. 눌러쓴 갓을 올리며 “하룻밤 자고 가리다” 나그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옥분아, 객방에 군불을 지펴라” 주모가 소리쳤다.

 
​저녁 준비를 할 동안 나그네는 마루에 걸터앉아 탁배기를 시켰다. 소반에 간단한 밑반찬과 함께 탁배기 한호리병을 얹어 마루에 놓자 “주모, 여기 잔 하나 더 놓고 젓가락도 하나 더 놓으시오” 했다. 주모가 배시시 웃으며 “또 한분이 뒤따라오시는가 뵈” 하자, 나그네는 굵직한 목소리로 “아니오. 내 일행은 없소이다.”
 
​“호호호호.” 주모는 부엌에서 술잔과 젓가락을 들고 오며 “아니어도 목이 마르던 참인데…” 하며 나그네와 대작하려고 술상 앞에 널찍한 방댕이를 걸쳤다. 나그네가 말했다.
 
​“주모도 술 한잔 하고 싶으면 잔과 젓가락을 또 가지고 오시오.”
 
​주모는 어리둥절해졌다. 주모가 또 빈 잔과 젓가락을 들고 오자 잔이 세개가 되었다. 주모가 나그네에게 술 한잔을 따르자 “여기 빈 잔에도 술을 따르시오” 주문했다. 주모가 빈 잔에 술을 따르고 나자 나그네가 호리병을 받아 들고 주모 술잔을 채웠다.
나그네는 제 술잔을 비우고 나서 임자 없는 술잔을 또 비웠다. 주모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그네를 쳐다보자 “주모, 저녁상을 차릴 때 두사람 상을 부탁하오.” 객방에 군불을 지펴 놓은 옥분이가 부엌에 들어가 저녁상을 차렸다.
탁배기 두호리병을 비우자 나그네는 객방으로 들어가고, 곧이어 주모가 기괴한 저녁상을 들여놓고 나왔다. 주모는 나그네 방이 궁금해 다락에서 더덕주를 꺼내 들고 “육십년 된 더덕은 산삼보다 낫답니다” 하며 객방으로 들어갔다.
 
​나그네는 또 빈 잔을 가져오라 했다. 나그네는 자기 밥 한숟갈을 떠 먹고 자리를 바꿔 다른 밥을 한숟갈 먹었다. 더덕술도 자기가 한잔 마시고 빈자리 술잔을 또 마셨다. 주모가 무슨 사연이 있느냐고 조르고 또 조르자 나그네는 마지못해 털어놓았다.
 
​“어릴 때부터 한동네에 살며 서당에서 함께 공부해 큰일을 하자던 죽마고우가 작년에 이승을 하직해….”
 
​나그네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늘어뜨린 채 어깨를 들썩였다. 주모는 감격했다. ‘이 메마른 세상에 이렇게 의리 있는 사람이 있다니!’
 
​술이 잔뜩 취한 나그네와 주모는 그만 호롱불을 끄고 훌렁훌렁 옷을 벗어 던졌다. 삼십대 건장한 나그네와 사십대 농익은 주모가 살과 살을 붙여서 온 방을 헤집다가 가쁜 숨을 토하고 쓰러져 잠이 들었다.
 
​새벽닭이 울 때 소피를 보고파 주모가 눈을 떴을 때 나그네가 없어졌다. 옷을 챙겨 입고 이 방 저 방을 돌아보던 주모가 장작개비를 치켜들고 친정 조카딸 옥분이 방문을 열었다. 발가벗은 옥분이에게 올라탄 나그네가 말했다.
 
​“내 친구는 술만 마시고 혼자 자란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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