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모음

폐가에 와서 분홍을

by 진밭골 2018. 5. 17.

     폐가에 와서 분홍을

                                    변희수(1963~ )


그날 당신은 내게 폐가 한 채 남겨주고 떠났네


늑골 같은 담벼락에 삐딱하게 기대선 개복숭나무 한 그루

마지막 담밸 빨듯 붉은 꽃들을 뻑뻑 피워대고 있었지


아무 대문이나 불쑥 당신을 열어보고 싶었지만

한 모금씩 낡은 골목의 폐부로 스며드는 분홍


분홍이란 폐가에 와서도 환해질 수 있구나


삭은 기둥이며 서까래며 어두운 구석마다

쿨럭쿨럭 신음들이 새어나올 것 같은데


객지에서 막 돌아온 사람처럼 나는 말이 없어지고


적막보다 깊은 연소를 생각해 보네

살과 뼈가 남아있는 마음을 태워 분홍을 얻네


처음 배운 담배처럼 메케하게 어리는 꽃 그림자


그날 나는 남은 마음을 태우러 갔었네

'시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찔레꽃  (0) 2018.06.21
만월  (0) 2018.06.09
반나절 봄  (0) 2018.04.26
한모금씨 이야기  (0) 2018.04.22
봄밤  (0) 2018.0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