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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이야기

초남이 성지(생가터)

by 진밭골 2023. 11. 7.

복자 유항검(아우그스티노)이 나고 자란 생가터 입구

 

복자 유중철(요한)과 복자 이순이(루갈다) 동정부부가 4년간 살았던 행랑채

 

유항검과 그의 가족이 신앙생활을 하였던 초남이의 궁궐 같은 집은 파가저택(破家瀦宅)형을 받아 집을

부수고 땅을 파서 웅덩이로 만들어 흔적이 사라졌고, 늦게까지 남은 웅덩이 자리 주위에 성지를 조성하였다

 

동정부부 생가터 기념 비석

동정부부 유중철(요한)과  이순이(루갈다)  복자 상

성요셉 성당, 월요일 오전 7사 미사 봉헌

 

○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초남부락

이곳이  ‘호남의 사도’라고 불리는 유항검(아우구스티노 1756~1801, 45세) 복자의 생가터가 자리한 곳이다. 1756년 이곳 초남리에서 아버지 유동근과 우리나라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바오로 1759~1791) 복자의 이모이자, 권상연(야고보 1751~1791) 복자의 고모인 어머니 안동 권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유항검은 윤지충과 함께 전라도 지방에 복음을 전파하는데 거의 절대적인 공헌을 한 초기 조선 천주교회의 핵심적인 인물이다.

  

○   유항검은 윤지충의 이종사촌 형이자 권상연의 외종사촌 동생인데, 유항검은 바로 윤지충을 통해 천주교 신앙으로 입문하게 된다. 유항검은 모계를 통해 권철신(암브로시오 1736~1801)과 일족일 뿐만 아니라, 이종사촌인 윤지충을 통해 이벽(세례자 요한 1754~1786), 이승훈(베드로), 정약전도 인척간이었으므로 초기 신앙의 시작이 되었던 경기도 양근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유항검은 양근의 권철신 집을 찾아가 권철신의 아우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1751~1792)에게 교리를 배우고, 그를 대부로 삼아, 이승훈에게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러니 미래의 며느리인 이순이(루갈다)의 친정 외숙부들을 통해 천주교 신자가 된 셈이다.

 

○  유항검은 호남의 갑부로서 덕망이 출중했으며, 자기 집을 방문하는 사람들과 식솔들에게 나눔의 생활을 실천하며 전교하였는데, 1801년 신유박해 때 전라도에서 체포된 200여 명 대부분이 그가 전교한 사람들이었다.

  고향에서 암암리에 전교 활동에 힘쓰던 유항검은 1786년 봄, 조선 천주교회의 창설 주역이자 가성직 제도를 설정한 이승훈에 의해 권철신, 홍낙민(루카), 최창현(요한),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등과 함께 신부(神父)로 임명되었다. 그러던 중 1787년 그는 가성직 제도의 부당성을 깨닫고 이승훈에게 그 시정을 요청하는 한편, 북경에 밀사를 보내어 오류를 범한 가성직(假聖職) 제도에 대해 정죄(淨罪)하고, 선교사들의 지시를 받도록 촉구했다. 그리하여 윤유일(바오로)이 밀사로 파견되었고, 유항검은 그의 후견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고 비용도 부담하게 되었다.

 

○  1801년 신유박해의 회오리는 이곳 초남리에 거세게 불어 닥쳤다. ‘사학의 괴수’로 낙인찍힌 유항검은 전라도 지방에서 가장 먼저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받고 서울로 압송되었다. 외국인 신부의 입국을 도와 내통했고, 사교를 믿었을 뿐만 아니라, 청나라에 청원서를 냈다는 죄목으로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죄를 적용해 머리를 자르고 사지를 자르는 능지처참(陵遲處斬)형을 언도 받는다. 유항검은 1801년 10월 24일(음력 9월 17일) 전주 남문 밖에서 유관검, 윤지헌(프란치스코, 37세)과 함께 참수치명 받았다. 또한 그의 생가를 파가저택(破家瀦宅)하고, 그 많던 재산도 몰수하였다.

 

○  같은 해 11월 14일(음력 10월 9일)에는 큰아들 유중철(요한 1779~1801, 22세)과 작은아들 유문석(요한 1784~1801, 17세)이 전주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1802년 1월 31일(음력 1801년 12월 28일)에는 유항검의 처 신희, 제수 이육희, 며느리 이순이(루갈다 1782~1802, 20세)와 조카 유중성(마태오 1783~1802, 18세)은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치명(斬首致命)하였다. 유항검의 16세 미만의 세 자녀는 귀양을 보냈다. 그의 9세인 둘째 딸 섬이는 경상도 거제부 관비로 보내고, 6세인 셋째 아들 일석은 전라도 나주목 흑산도 관노로, 그리고 3세인 넷째 아들 일문은 전라도 강진현 신지도 관노로 보냈다.

 

○  유항검 가족들의 시신은 일꾼들과 신자들이 거두어다가 백사발에 각각 이름을 적어 넣고, 초남리 바우배기에 매장하였다. 전동성당 초대 주임사제인 보두네 신부가 1914년 3월 사순절에 전동성당으로 안치했다가, 같은 해 4월 19일에 전주시 동편에 자리 잡고 있는 치명자산 위에 모셨다.

 

○  초남이 성지는 최초로 조선에 입국한 외국인 선교사인 중국인 사제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유항검의 초청으로 전라도에서는 처음으로 1795년 6월에 1주일 동안 방문한 곳이기도 하다. 주문모 신부는 유항검의 집에 머물면서 미사와 고해성사와 세례성사를 집전하였다. 그리고 유항검과 함께 여러 가지 교리를 진지하게 토론하였다.

 

○  주문모 신부가 초남이에 머물러 있는 기간에 유항검의 아들 유중철은 첫 영성체를 하고는, 부친의 허락을 받고 평생 동정(童貞)으로 살기로 서원(誓願)하였다. 그 무렵 서울에서도 한 유명한 신자인 양반 집안의 딸이 동정을 맹세하고 있었다. 조선 초기의 신자인 이윤하의 딸인 이순이(루갈다)가 그녀였다. 루갈다의 아버지인 이윤하(마태오 1757~1793)는 전주 이씨로서 지봉 이수광의 손자이자, 성호 이익의 외손자로, 할아버지의 학문을 이어받고 권철신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이윤하는 명례방 김범우(토마스) 집에서 열린 천주교 집회에 참석한 주요인물 중의 한 사람이었다. 루갈다의 어머니 권씨(1754~1835)는 권일신의 누이 동생이다.

 

○  이러한 사실은 곧 주문모 신부의 귀에 들어갔고, 주 신부의 주선으로 1798년에는 초남이에서 전대미문의 동정서약이 거행되었다. 유 요한과 이 루갈다가 “평생을 오누이처럼 살면서 동정을 지키겠다.”는  서원을 하느님과 부모님 앞에서 한 것이다. 바로 이들이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동정부부였다. 이곳에서 이 둘은 1801년에 치명할 때까지 4년간 동정생활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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