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에
박소란
그러니까 나는
다음이라는 말과 연애하였지
다음에, 라고 당신이 말할 때 바로 그 다음이
나를 먹이고 달랬지 택시를 타고 가다 잠시 만난 세상의 저녁
길가 백반집에선 청국장 끓는 냄새가 감노랗게 번져나와 찬
목구멍을 적시고
다음에는 우리 저 집에 들어 함께 밥을 먹자고
함께 밥을 먹고 엉금엉금 푸성귀 돋아나는 들길을 걸어 보자고
다음에는 꼭
당신이 말할 때 갓 지은 밥에 청국장 듬쑥한 한술 무연히 다가와
낮고 낮은 밥상을 차렸지 문 앞에 엉거주춤히 선 나를 끌어다
앉혔지
당신은 택시를 타고 어디론가 바삐 멀어지는데
나는 그 자리 그대로 앉아 밥을 뜨고 국을 푸느라
길을 헤메곤 하였지 그럴 때마다 늘 다음이 와서 나를
데리고 갔지 당신보다 먼저 다음이
기약을 모르는 우리의 다음이
자꾸만 당신에게로 나를 데리고 갔지
'오늘은 어려워요'라고 내가 답하면, '그럼 다음에는 꼭 한잔해요'라고 말하던 술꾼둘이 있었지. 그 술꾼들이 나와 연애하려고 그리 말한 것은 아니었으나, 다음에 마실 술에 나는 벌써 설레며 취했지.
다음에 취해서 당신을 생각해보면, 당신이 다음에 하고 싶은 것은 참으로 많았지. 다음에는 반듯한 양복 입고 가죽가방 들고 출근해보고 싶었지. 휴일에는 악기라도 하나 배우고 싶었지. 다음에는 연인에게 반짝이는 선물도 사주고, 다음에는 어머니께 큰 집도 사드리고 싶었지. 다음 계절의 어느 날에는 결근을 하고 멀리 여행을 떠나고 싶었지.
다음에는 나에게 더 잘하고 나를 더 잘 사랑하고, 다음에는 나와 더 잘 이별하고 나를 더 잘 잊고 싶었지. '다음에는'이라는 말로 돌탑처럼 자꾸만 무너지는 소망의 순간들을 붙들고 서 있던 당신을 이해할 수 있을까. 내가 다음에는.
<시인, 한국상대학원대학 교수 진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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