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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생각

흙과 먼지

by 진밭골 2024. 4. 9.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에, 우리는 머리에 재를 얹고 사람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하는 사제의 엄중한 말씀을 듣는다. 이 구절은 창세기에 나오는 것으로, 하느님께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벌을 주시면서 하신 말씀이 그 원본이다.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흙과 먼지는 인생의 유한함과 죄의 비참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또 한편 영원한 고향이 따로 있다는 것을 깨우치는 상징이기도 하다. 한 줌 재에 불과한 나를 하느님께서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 나를 기다리시는 하느님께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구세주께서 나타나시기 전에는 우리의 인생에 평안과 휴식은 없었다. 허무에서 나와 무상한 변천 속을 잠시 헤매다가 다시 허무로 돌아갈 뿐, 그 애처로운 허우적거림에 무슨 의미나 보람이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영원하신 분께서 이 조그마한 흙덩이를 어째선지 사랑하셨다.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우리와 같은 육체를 입으시기까지 하셨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신 덕분에, 하느님의 벌을 짊어지고 있던 우리 육체가 예수님과 하나 되는 영광을 입은 육체로 바뀌었다. 여전히 흙이고 먼지이지만, 여전히 시달리고 피곤하고 괴로움을 겪지만, 더 이상 허망하거나 비참하지 않다. 더할 수 없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승의 삶은 찰나지간이지만 우리를 창조하신 분께서는 영원하시고, 그분의 사랑은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으신다. 그러니 세상이 어찌 변하든 걱정할 필요가 없고, 다만 돌아가야 할 고향집을 기억하면 되는 것이다. 지쳐서 힘이 들 때, 우리를 위로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자.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 하지 마라.”

 

  정태우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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