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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야기

[스크랩] 우리땅 대마도 여행가기 ~~

by 진밭골 2014.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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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릉도 도동공원에 있는 대마도비
 

    ♣ 우리땅 대마도(對馬島) 여행가기 ♣ 대마도 원주민들이 사용하는 말중에 총각이란 말과 지게란 말이 있는데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총각(숫총각)과 지게(물건을 지고가는 것)를 똑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어요 대마도 주민에게 ‘총각’과 지게가 한국말이라고 알려주자 깜짝 놀라고 있어요 일본 본토 지역에서는 이런 말을 들을수 없어요 대마도 에서만 통용되는 한국어 단어는 지금도 300개가 넘는다 하네요 이것이 우리민족이 대마도에서 오랬동안 살았다는 중요한 증거 이지요 울릉도 도동항에 가면 도동공원이 있는데 여기에 대마도에 관한 비석이 서 있어요 대마도본시아국령(對馬島本是我國領)"대마도는 본래 우리나라 땅이다" 그런데 지금은 일본영토가 되어 있는 대마도가 원래 우리의 영토였음을 확인하는 석비가 왜 이곳에 있을까요? 대마도는 남북으로 72km, 동서로 16km인 고구마 모양의 두 개의 섬으로 형성되어있어요 총면적은 714㎢이고, 일본보다는 우리나라에 아주 가깝지요 부산에서 49.5km 거리에 있으나 일본 규슈에서는 147km 떨어져 있어요 대마도는 섬이라기보다는 ‘바다에 떠있는 산’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로 산이 많은데 특히 남섬은 375.5m의 원견산을 필두로 328.6m의 홍엽산 158.2m의 백악산 등이 있어 온 섬이 산으로 덮인 듯한 느낌을 주고 있어요 대마도가 우리의 영토였다는 사실은 여러 문헌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대마도는 고려 때부터 우리의 속령이었지요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고려 문종 36년(1803)부터 공민왕 17년(1368) 사이 대마도에서 사신을 보내 방물(方物)을 바친 기록이 있어요 해행총해(海行總解)는 조선초 신숙주 등 17명의 관리가 통신사로 일본에 다니면서 남긴 기록물인데 이 기록에 의하면 ‘삼국시대에 이미 일본에 사는 왜인들은 대마도를 외국으로 보았고 대마도 사람들은 스스로 반(半)조선인으로 불렀다는 기록이 있어요 세종원년(1419) 조선정부는 삼군도체찰사 이종무로 하여금 대마도를 정벌케 했으며 세종 9년(1427) 7월 17일 병조판서 조말생 명의로 항복하라는 문서를 보냈는데 이 문서에는 "대마도는 경상도 계림(경주)에 예속된 곳이라 본디 우리 영토다"라고 되어 있어요 세종 24년(1442) 신숙주는 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가서 대마도에 대한 계해조약(癸亥條約)을 체결하고 돌아왔어요 신숙주는 성종 2년(1471)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저술했는데 이 책에는 대마도가 우리 영토라고 전제하고 도민들의 풍속을 소개하고 있지요 조선 초기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유대마도서(諭對馬島書)에도 대마도는 경상도 계림에 예속된 본시 우리의 영토라는 내용이 있으나 조선민족은 대륙문화의 계승자로서 대체로 도서사람을 경시하는 풍조가 있었지요 그래서 그런지 그때 대마도를 척박한 섬으로 보아 울릉도와 독도, 대마도를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묶어 경상도 경주(계림)에 예속케 하였지요 그래서 대마도비를 울릉도에 세우게 되었다고 하는군요 그러나 행정구역으로 울릉도 독도 대마도를 경주에 예속시켰지만 바닷길이고 거리가 먼 관계로 주민들이 섬에가서 거주하는 것을 싫어했다 하네요 이를 틈타 일본 본토에서는 범법자와 범죄자가 대마도로 흘러들어 왔으며 이들로 인해 대마도는 해적소굴이 되었지요 이들이 조선의 해안지대를 수시로 침범해 약탈하자 조선은 항복을 권유하기도 하고 토벌을 감행하기도 하였어요 이렇듯 대마도는 고려 공민왕 이래 600여년간 조선과 조공을 바치고 양식을 얻어가는 속방(屬邦)이었으나 일본 신제국주의의 마수에 걸려 일본에 귀속되었어요 당시 조선조정은 1863년 즉위한 고종을 대신해 대원군이 섭정을 하고 있을 때였으며 1865년부터 조선은 임진왜란 때 타버린 경복궁을 중수하는데 전심전력하고 있었고 그 전해에는 전국 서원의 향교와 사당을 철폐하고 척사조치를 취하는 등 쇄국봉건체제를 강화하고 있었지요 이러한 와중에 1868년 일본정부는 일본이 왕정체제로 복귀해 새로운 정부가 탄생했음을 조선에 통고하였어요 이에 대해 조선조정은 서계(書契)상의 문구가 불손하다 하여 접수를 거절하였고 그러다 1875년 강화도에서 프랑스함대 운양호사건이 발발하였으며 이듬해인 1876년 조선은 일본과 치욕적인 병자수호조약(丙子修護條約)을 체결하게 되었지요 이 조약이 체결된 이후 임오군란- 갑신정변- 청일전쟁- 명성황후 시해- 노일전쟁- 을사보호조약- 한일합방- 3.1 독립선언- 광복으로 숨 가쁜 현대사가 이어져 왔는데 우리는 이 격랑의 세월동안 대마도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지요 광복후 대마도가 우리의 영토라고 주장한 문헌으로는 "대마도의 조선환속과 동양평화의 영속성"(정문기 작1948)이 있지요 이에 의하여 미 군정시기인 1948, 2, 17. 입법원204차 회의에서 대마도를 조선영토로 복귀시킬 것을 결의하였으나 회기만료로 무산되었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정부출범 직후인 1948, 8, 18. ‘대마도반환요구’를 발표하고 그해 9월 9일과 1949년 이듬해에도 대마도 반환을 주장하였으나 6.25전쟁으로 관철하지 못하고 지금에 이르고 있어요 섬 전체의 88%가 척박한 산악지형이고 농토는 3%도 안되는 대마도의 생존과 성쇠는 역사적으로 한반도와 교류를 통해 크게 좌우돼 왔어요 대마도향토연구회 회장인 "나가토메 히사에"는 “한반도와 대마도의 관계는 밝았던 시대와 어두웠던 시대가 있다”고 말했어요 그는 좋았던 시기로 기원전 3세기∼2세기의 500년과 조선 초기를 들었지요 그때는 조선인이 약2만여명 대마도에 살았다고 증언하고 있어요 일제강점기 때도 대마도는 인구가 9만여명에 이를 정도로 융성했는데 그러나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한국과의 교류가 끊기면서 인구가 해마다 줄어 지금은 3만6천여명에 불과하지요 한국인도 일제강점기에는 2만여명이나 살았지만 지금은 60명에 지나지 않는다 하는군요 1999년 부산∼대마도간 정기여객선이 취항한 이후 한국인 관광객이 급증하고 있는데 지난 한해동안 1만5300명의 한국인이 대마도를 찾았어요 파도가 높아 부산항에서 출발하는 여객선이 뜨지 않으면 대마도의 주요 호텔과 음식점들은 텅 빈다 하네요 조선시대 때도 대마도엔 주기적으로 ‘조선 붐’이 일었어요 관료 학자 통역관 악대 등 500여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문화사절단인 조선통신사 행렬이 지나갈 때면 대마도는 후끈 달아올랐지요 지금도 대마도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200여년 동안 12차례에 걸쳐 파견된 조선통신사의 족적이 곳곳에 남아 있어요 웬만한 절이나 관공서에는 ‘조선통신사가 묵었던 곳’이라는 대리석 표지판이 세워져 있으며 매년 8월 첫째 일요일에 조선통신사의 행렬을 재연하는 ‘아리랑 마쯔리’가 지금도 열리고 있지요 이때 대마도 주민들은 한복으로 갈아입고 조선통신사 행렬에 참가 했으며 주로 부산 동래구청장이나 구의회의장이 초청돼 조선통신사의 정사(正使)가 타던 가마에 타며 그 호위는 대마도에 진주해 있는 육상자위대와 해상자위대의 대장이 맡는다 하네요 조선 왕실이 대마도의 수직왜인(受職倭人)에게 벼슬을 내리면서 준 임명장을 ‘고신’(告身)이라 하는데 대마도가 조선의 정치체제에 편입돼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지요 대마도역사민속자료관에 전시된 유물 중 조선왕실의 관직 임명장인 고신(告身·고쿠신)이 특히 흥미를 끌고있어요 대마도가 조선에 정치적으로 예속돼 있었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로 이를 받은 사람들은 수직왜인(受職倭人)으로 불렸어요 그래서 그런지 자료관 직원은 왠지 고신에 대해서만 “박물관 소유의 물건이 아니다”며 설명을 하지않아 자세히 들여다보니 ‘한국 국사편찬위원회 소장’이라고 쓰여 있었지요 그래서 고신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자 그 직원은 거북한 표정으로 애써 그 의미를 축소하려 들었지요 “대마도에 꼭 일본사람만 있었던 것은 아니며 한국과 중국 출신도 많았다. 고신은 한국 출신 으로서 조선왕조의 스파이 역할을 하다가 공을 인정받은 사람들이 받은 것이다” 이라고 애써 그 의미를 왜곡 축소하고 있어요 리아스식 해안으로 둘러싸여 호수처럼 잔잔한 아사우(淺海)만은 요즘 한일 양국의 프로 낚시꾼들이 즐겨 찾는 유명한 낚시터이지만 오랜 기간 왜구의 소굴이었던 천혜의 요새이지요 조선 태종 때 이종무 장군도 아사우만 일대에 한 달간 머물며 왜구를 소탕했어요 이 일대에는 667년에 백제 유민들이 나당연합군의 침공에 대비해 쌓은 백제식 산성인 ‘가나다노기’(金田城)가 있는데 백제와의 인연은 13세기 중엽까지 대마도를 지배했던 ‘아비류’(阿比留)씨 가문의 혈통에서도 더듬어볼수 있어요 ‘아비류’는 ‘아사달’ ‘아직기’ ‘아사녀’ ‘비류백제’ 등과 어원이 같은 백제 계통의 성씨인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이지요 15세기 대마도를 통치한 관청이었던 ‘엔쓰지’(圓通寺) 내의 조선범종은 태극의 팔괘와 비천상 무늬가 확연히 새겨진 우리나라 범종임을 한 눈에 알수 있어요 요즘 대마도에 한국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하네요 작년 3월 시로 승격한 대마도엔 산을 깎고 온천과 골프장 등을 개발하는 공사가 한창이지요 더 많은 한국 사람들을 끌어들이려는 의지가 섬 곳곳에서 느껴지고 있어요 대마도가 속해 있는 나가사키(長崎)현은 정부에 ‘대마도 특구’ 법안을 제출했다 하네요 이 안에는 대마도를 찾는 한국 관광객에 한해서는 비자 면제, 섬내 토지이용 및 취득 규제 완화 한국어 교육 확대 등의 정책이 포함돼 있다 하는군요 실제로 지난해부터 모든 한국인 에게 비자를 면제해주고 있어요 또한 대마도고교 국제교류과 학생들은 졸업학점(25학점)중 한국어 5학점을 필수과목으로 이수하도록 돼 있어요 그리고 미쓰(美津)지역에는 (대마도에 별장을)이라는 흥미로운 벽보가 나붙어 있는데 일본어와 한국어로 ‘대마도의 토지와 건물을 한국의 모든 분들이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토지와 건물의 판매 가격은 2000만원부터’라는 내용이 담겨 있어요 벽보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어 “한국 사람인데 대마도의 농가주택을 구입할수 있겠느냐”고 물었더니 일본인 부동산업자는 “한국의 주민등록증만 제시하면 살수 있고 등기도 가능하며 가격은 평당 20만∼30만원대”라고 대답하고 있어요 대마도 시청의 우치다 히로시(內田洋) 총무기획부장도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해 주면서 “50km 떨어진 부산엔 400만∼500만명이 살고 있는데 150km 떨어진 후쿠오카의 인구는 200만명에 불과하다며 눈앞에 좋은 시장이 있는데 왜 한국과 교류하지 않겠는가”라고 덧붙이고 있어요 일본이 실효적으로 대마도를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당장 우리가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대마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용이하지 않을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우리가 실효적 지배하고 있는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있으니 우리 또한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우리땅이 분명한 대마도를 가만 두어선 안되지요 우선적으로 민간교류를 활성화 시켜 대마도를 한국의 경제권과 문화권에 편입시키는 것이 좋다 하네요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대마도 주민들이 일본 보다는 한국을 더 선호하게 되고 "한국없이는 못살아!" 소리가 나올때 서서히 영토분쟁지역으로 만들면 된다 하네요 그런후 대마도 주민투표로 대한민국 귀속을 원하면 일본도 어쩔수 없다 하는군요 아니면 대마도 주민들이 "대마도 독립"을 선언해도 좋은 일이구요 아무튼 대마도에 별장도 짖고 낚시도 하고 캠핑도 가고 자전거 하이킹도 가고 많은 민간교류가 이루어지면 우리땅 대마도를 되찾아 오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하네요 우리 대마도를 자주찾아 우리땅 찾는데 일조 하기로해요 -* 언제나 변함없는 산적:조동렬(일송) *- *** 대마도의 이곳저곳

    ▲ 대마도 지도 부산항에서 1시간 남짓. 울울창창한 자연이 있고 아직 때묻지 않은 도시, 시골 마을이 아름답게 펼쳐진 대마도의 일본명은 쓰시마 이지요 후쿠오카보다 부산이 더 가까운 이 섬을 방문하는 한국인 여행객이 많이 늘고 있는데 이스하라마치, 미쓰시마마치, 도요타마마치, 미네마치, 가미아가타마치, 가미쓰시마마치 등 대마도를 이루고 있는 모든 지역이 아름답지만 우선 배가 정박하는 가미쓰시마마치와 이즈하라마치의 여행지를 소개하기로해요 대마도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름이지요 그러나 여행지로서의 대마도는 생소한 편이에요 그저 낚시꾼들이 자주 다니는 곳 정도로만 생각했었지요 그런데 알고 보니 대마도를 여행하는 한국인의 수가 일년에 1만5천명에 달한다고 하네요 물론 그 안에는 낚시꾼들도 포함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여행객들은 일반 여행객들이지요 1)미우라 해수욕장  기사의 0번째 이미지 ▲ 풍광이 아름다운 미우라해수욕장...

    대마도는 시청이 있는 이즈하라마치, 미쓰시마마치, 도요타마마치, 미네마치, 가미쓰시마마치, 그리고 가미아가타마치 등 모두 6곳의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어요 부산에서 출발한 배가 제일 먼저 도착하는 곳은 가미쓰시마마치 이즈하라 항이지요 대마도에서 제일 규모가 큰 이즈하라마치는 가장 많은 여행자들이 찾는 곳이에요 일본의 역사와 전통을 느낄수있는 거리풍경, 일본 시골의 자연을 만끽할수있는 녹지와 문화 유산들도 많아요 특히 면암 최익현 순국비, 덕혜옹주결혼봉축기념비 등 한국의 역사와 직접 관련 있는 흔적들이 이곳에 많이 있어요 2) 쓰쓰자키  기사의 1번째 이미지 ▲ 쓰쓰자키공원...

    대마도 최남단에 위치한 곶(갑)으로 대한해협에서 쓰시마해협으로 돌아들어 오는 곳에 돌출되어 있어요 거친 바다 위에 점점이 떠있는 작은 섬들과 암초들 그리고 바다 저편의 새하얀 등대가 절경을 이루고 있지요 20m 높이의 등대는 쓰시마난류를 타고 북상하는 선박들의 훌륭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는데 해류가 교차하는 곳이라 어종이 풍부하고 성게, 소라, 전복, 방어 등이 많이 잡힌다 하네요 바다를 보고 있는 것 자체로 영감이 마구마구 떠오르는 힐링 포인트라 하는군요 3)가마자카 공원 ▲ 가마자카’공원 전망대에 오르면 호수처럼 고요한 아소만이 발아래로 펼쳐집니다...

    표고 385m에 위치한 전망대로 대마도는 물론 일본의 대표적인 리아스식 해안인 아소만의 신비로운 풍경을 한눈에 볼수 있어요 맑은 날에 올라가면 멀리 일본 본토의 규슈와 한국의 남해안에 펼쳐진 산의 모습을 볼수도 있는데 아소만은 대마도 여행에서 빠질수 없는 명소라 하네요 전형적인 리아스식 해안으로 점점이 떠 있는 보석 같은 섬들이 구름을 휘감고 있어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별세계에라도 온듯 마음이 들뜬다 하는군요 4) 원시 자연의 보고 다테라야마 ▲ 원시림으로 유명한다테라야마 ...

    해발 559m의 다테라 산은 북쪽 측면 해발 120m 지점에서 정상까지 분포하고 있는 원시림으로 유명한 곳이지요 해발 350m 부근을 경계로 하단은 구실잣밤나무, 상단에는 북가시나무가 분포하고 있는데 상단의 구실잣밤나무 숲은 나무의 높이가 20m, 밑둥의 최대 반경은 1m에 달한다 하네요 상단의 구실잣밤나무 숲은 습기가 많은 표고 1500m에서 발달하는 산림으로 북가시나무를 비롯하여 야생 동백나무, 황칠나무, 광나무 등이 생육하고 있으며, 간혹 조롱나무도 볼수 있다 하는군요 다테라야마 원시림은 저지대에서부터 고지대까지 광법위하게 분포하고있어 귀중한 자연환경으로 보호받고 있으며, 세계적으로도 그 예를 찾을수 없는 자연 그대로의 보존 상태와 넓은 면적을 자랑하고 있어요 5) 에도시대 선착장 오후나에 ▲ 조선과의 무역에 주요했던 쓰시마번주의 선착장...

    이즈하라 항의 남쪽 구타(久田)포에 남아있는 옛 에도시대 쓰시마 번주의 선착장으로 항해에서 돌아온 배를 격납하거나 수리하던 곳이지요 내부에 4곳의 돌출 제방과 5곳의 선거(독,dock)가 있어요 이 유적은 1663년에 축조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현재 돌담은 당시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지요 만조시에는 많은 양의 바닷물로 채워져 대형 선박도 출입할수 있으며 반대로 간조시에는 물이 빠져 화물의 선적 등에 편리하도록 되어 있다 하네요 정문, 창고, 번주의 휴식처 등도 남아 있어 당시의 웅대한 규모를 엿볼수 있어요 6) 비극의 여인 덕혜옹주 결혼봉축기념비  기사의 5번째 이미지 ▲ 대마도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이 세운 축하 기념비...

    소설로 발표되면서 더욱 유명한 사람이 된 조선왕조 고종의 딸 덕혜옹주는 제국주의 일본의 정략에 의해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일본의 쓰시마 번주 타케유키 백작과 결혼 딸 종혜까지 보았으나 1955년에 파경을 맞았고 1961년에 귀국 1989년 창덕궁 낙선재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았지요 그러나 그가 결혼했을때는 쓰시마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이 순수한 마음으로 축하 기념비를 세워주었어요 7) 대마도 번주의 가족묘(반쇼인)  기사의 6번째 이미지 ▲ 대마도주들의 가족묘...

    에도시대 쓰시마번의 관청이 위치해 있었던 이즈하라의 서쪽 아리아케(有明)의 산기슭에 위치해 있어요 낙엽수림이 뒤덮힌 일대를 포함해 ‘쓰시마번주 소가묘소’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일본 3대 묘지 중 한 곳이지요 사원은 초대 번주(宗가 19대) 요시토시(義智)의 뒤를 이은 제2대 번주 요시나리(義成)가 아버지를 기리며 1615년에 창건한 쇼온지(松音寺)를 1622년 요시토시의 법호를 따라 반쇼인으로 개칭한 곳으로 이곳에 역대 쓰시마번주와 그 일족이 모셔져 있어요 묘지는 햐쿠간기(百雁木)로 불리는 132개의 돌계단을 오른 곳에 마련되어 있는데 이즈하라에 처음으로 관청을 둔 제10대 종가 사다쿠니와 요시토시 이하 32대까지의 번주와 그 가족의 묘가 울창한 숲 속에 자리잡고 있지요 상단에는 요시토시 이래의 번주와 그 정부인 중단에는 측실과 아동 하단에는 일족 및 소가(宗家)에서 출가한 사람 등이 모셔져 있는데 그 중에서도 대조선무역이 활발하였던 시기의 번주 요시나리(義成)와 요시자네의 묘는 다른 묘에 비해 훨씬 커 쓰시마와 조선의 무역이 얼마나 활발하였던가를 짐작케 하고 있어요 8)쓰시마역사민속자료관

    ▲ 고려문...

    나가사키 현에서 1978년에 설립한 민속자료관이지요 쓰시마섬의 문화재 고고 역사 자료 민속 자료 명문가의 문고 등 귀중품이 전시되어 있어요 조선통신사 행렬도를 볼수도 있는데 대마도를 제대로 알고싶다면 꼭 들려봐야 할 곳이라 하네요 9) 면암 최익현 순국비  기사의 7번째 이미지 ▲ 구국항일투쟁의 상징인 최익현 순국비...

    구한말 대유학자이자 구국항일투쟁의 상징인 최익현은 쓰시마에 유배되어 순국하였지요 쓰시마에서 감금 3년형을 받게된 최익현은 1906년 8월 28일 아침 이즈하라로 호송되어 왔어요 그는 2년형을 받은 임병찬과 함께 하치만구 신사 남쪽에 위치한 제사전습소에 수용됐는데 쓰시마경비대 수용소가 완성되기 전 3개월간 이곳에 구류되었어요 임병찬의 <대마도일기>에 의하면 12월 4일 발병의 기록이 보이며 경비대에서는 사람을 붙여 간호하였으나 1907년 1월 1일 생을 마감하였지요 장례는 백제의 비구니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슈젠지에서 치뤄졌으며 유해는 부산으로 이송됐어요 선생의 넋을 기리고자 1986년 한일 양국의 유지들이 힘을 모아 슈젠지에 비를 세웠지요 10) 은어가 돌아오는 자연 공원 아유모도시 자연공원  기사의 8번째 이미지

     기사의 9번째 이미지

    ❶ 아유모도시 자연공원 ❷ 나루타키 ❸ 신화의 마을 자연공원 ❹ 한국전망대 ❺ 엔쓰지(원통사)

    세강은 대마도에서 제일 높은 산인 야타테야마와 다테라야마에 둘러싸인 우치야마 분지에서 발원하고 있어요 이 세강 유역을 포함한 다테라야마 원시림의 산기슭 약 26ha가 아유모도시 자연공원으로 정비되어 있지요 산속 깊은 곳까지 수량이 풍부하여 은어가 많이 거슬러 올라 오는 것으로 유명하나 세강의 거친 물살로 인해 상류인 우치야마 지역까지는 올라가지 못한다 하네요 공원 입구의 주차장에는 이시야네 휴게소가 마련되어 있으며 세강 위에 걸쳐 있는 구름다리에서 강을 내려다 보면 계곡 전체가 천연의 화강암으로 둘러싸인 웅대한 경관을 감상할수 있어요 표고 144m의 높이에 마련되어 있는 만남의 광장을 중심으로 세강의 사면에 스포츠 슬라이더 잔디썰매장, 퍼팅골프장, 캠프장, 삼림욕장 등이 산책로로 연결되어 있는 곳이지요 11)축제도 보고 여행도 하고 대마도에서는 매달 크고 작은 축제가 열리고 있어요 여름에 열리는 축제로는 지조봉, 야쿠마, 이사리비, 쓰시마아리랑축제, 쓰시마친구음악제 등이 있는데 7월 24일 이즈하라마치 시내에서 열리는 ‘지조봉’은 현지 어린이들이 건강하게 잘 자랄 것을 축원하는 축제로 시내 곳곳에 유카타 차림의 남녀들과 집안의 안전과 사고 방지, 평화를 기원하는 신앙의 상징인 지장보살상이 새단장을 한 모습을 볼수 있다 하네요 또한 8월 4일과 5일에 이즈하라마치 시내에서 열리는 ‘쓰시마 아리랑 축제’는 쓰시마 최대 규모의 축제로 ‘조선통신사 행렬’ 재현, 한일 전통무용, 어린이 가마행렬, 노젓기 대회, 불꽃놀이 등의 행사가 진행된다 하네요 쓰시마 친구음악제는 미쓰시마마치 쓰시마 그린파크에서 8월 네번째 토요일에 열리고 있어요 한국과 일본의 유지션이 참가하는 음악 축제로 바비큐파티에 참여할수 있다 하네요 12)가미쓰시마마치 ▲ 이즈하라 항 ...

    부산항에서 배로 한 시간이면 도착할수 있는 정말 가까운 곳이지요 대마도 최북단이라 할 수 있어요 한국전망대 등 우리나라와 연관된 공간과 일본의 자연, 특히 너무도 아름다운 미우다 해수욕장이 있는 곳이지요 차분하고 조용한 멋을 자아내는 섬 대마도. 단풍 길에서부터 온천과 캠핑까지 저렴하고 다양한 해외여행을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이국적인 멋을 즐길수 있는 곳이지요 부산에서 쾌속선을 타고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일본 서남쪽의 대마도 가장 가깝다는 본토의 규슈까지의 거리가 132km이고 오히려 부산까지의 거리가 50km도 채 안되는 섬 대마도는 부산에서 바라볼때 말 두 마리가 마주 보는 모습으로 보인다 해서 대마도로 불리게 되었고 일본의 신화 속에선 일본의 수많은 섬 중 가장 먼저 생겨난 섬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어요 대마도의 주요 관광지는 대부분 이즈하라 항이 위치한 하도에 집중되어 있지만 상도에도 몇 곳이 있어요 바로 대마도 최북단에 있는 한국전망대 일본 100대 해수욕장의 하나인 미우라 해수욕장, 단풍가도, 그리고 에보시타케 전망대이지요 13 한국전망대 ▲ 한국전망대 한국까지 49.5km로 날씨가 좋을때는 부산이 보인다 하네요 ...

    쓰시마 최북단 와니우라의 한국전망대는 한국이 가장 가까이 보이는 곳이지요 날씨가 좋은 날은 부산시의 거리가 보이는 그야말로 ’국경의 섬’임을 실감케 하는 곳이에요 전망대 주변으로는 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으며 해안 단구의 높은 지형에 위치해 있어 멀리 작은 무인도들이 징검다리처럼 보인다 하네요 전망대 건축물은 한국의 건축양식으로 1997년에 세워진 것인데 기와지붕의 팔각정 형태로 서울 탑골 공원에 있는 정자를 모델로 했고 전망대로 진입하는 도로 입구에 세워진 문은 부산국제여객터미널의 것을 모델로 했다 하는군요 설계단계에서부터 한국 학자에게 자문을 구했으며 한국산 재료 구입 및 전문가 초빙 등 철저히 한국풍을 고집하고 지은 작품이지요 14) 태고 흔적 걷기 아지로 연흔 가미쓰시마마치 아지로지역에 해변을 따라 길이 약 200m, 높이 약 15m의 장대한 규모의 울퉁불퉁한 모양의 바위가 있는데 이것은 얕은 바다의 잔물결의 흔적이 화석화된 것으로 ‘연흔ʼ이라 부른다 하네요 태고적 지질시대의 산물이지요 규모도 매우 커 태고의 물결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라네요 쓰시마의 지질은 섬 전체가 다이슈층으로 칭해지는 사암(모래가 물속에 갈아 앉아 굳어서 된 바위)과 혈암(점토가 엉겨 붙어서 된 암석)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지질층은 두께가 4000m 이상에 달한다고 하네요 17) 바다로 들어간 영령을 위하여 조선국역관사순난비 ▲ 한국전망대 옆에 있는 '조선국역관사수난비'...

    1703년 음력 2월 5일 아침, 부산항을 출항한 배 3척이 있었어요 정사 한천석, 부사 박세양을 비롯한 108명의 역관사(통역관) 일행이 탄 사선과 쓰시마번의 책임자 야마가와 사쿠자에몬이 방문을 위해 보내준 자신의 배와 예인선이었지요 출항 당시에는 날씨가 좋아 순풍을 타고 순조롭게 항해를 하고 있었으나 정오가 지난 후 기상이 급변하여 3척 모두 좌초되어 침몰하고 말았어요 사고가 나자 당시 쓰시마번과 마을 사람이 구조와 수색작업을 벌였으나 생존자는 단 한명도 없었다고 하네요 도착지가 바로 눈앞에 보이는 와니우라 앞바다에서 전원이 사망하는 비참한 해난사고가 발생한 것이지요 그로부터 380여년 뒤인 1991년 3월 20일 한일건립위원회가 이국의 바다에서 생을 마감한 역관사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조난 현장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한국전망대 바로 옆)에 추모비를 세웠다 하는군요 16) 대마도 상징나무 와니우라 이팝나무촌  기사의 10번째 이미지

     기사의 11번째 이미지 ▲ 이팝나무 원산지가 대마도라 하네요 ...

    쓰시마市의 시목인 이팝나무 군락지인 와니우라는 이팝나무가 아니더라도 들려볼만한 해안 마을이지요 이팝나무는 높이 15m, 둘레 70cm에 달하는 낙엽목으로 대만과 한국, 중국 대륙에 주로 분포하고 있으며 일본에서는 가미쓰시마치의 와니우라 일대와 중부지방의 기소강 유역(아이치현 이치노미야시)에서만 자생하고 있어요 5월경 1.5~2cm의 꽃잎이 4개로 갈라진 순백의 꽃이 활짝 피어 마치 눈이 내린 듯한 풍경이 와니우라 만의 바다에 비쳐 무릉도원을 연상케 하는데 1928년 와니우라지구는 이팝나무 자생지로써 국가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어요 가미쓰시마 지역 우메야호텔 0920-86-2016 / 쓰시마호텔프라자 0920-86-3216 / 가미소호텔 0920-86-3120, 오다여관 0920-87-0065, 유타카소 민숙 0920-86-3262 / 니시도마리 민숙 0920-86-2685 / 이즈미 민숙 0920-86-3571 야나기소 민숙 0920-86-2765 / 다치바나 민숙 0920-86-3173, 이무다펜션 0920-86-3110 이즈하라 지역 씨사이드호텔 하마유 0920-52-2769 / 쓰타야호텔 0920-52-0806 / 호텔카키타니 0920-52-1860 호텔킨세키칸 0920-52-0154 / 호텔쓰시마 0920-52-7711 / 마루야 호텔 0920-52-1970 / 야나기야호텔 0920-52-0332 쓰시마 대아호텔 0920-52-3737 / 뷰호텔 미즈키 0920-52-2188 / 씨사이드 아넥스 0920-52-2343 호텔 벨포레 0920-52-1301 / 반쇼카쿠 여관 0920-0021 우메노야 민숙 0920-57-0096 / 가이키소 민숙 0920-52-0784 / 가즈야 민숙 0920-57-0303 아비루 민숙 0920-57-0839 / 미나토 민숙 0920-52-1098 / 곤도 민숙 0920-57-0775 스가와 민숙 0920-52-6058 / 다치바나 민숙 0920-57-0678 / 쓰쓰민숙 0920-52-2728 나카무리 민숙 0920-52-2527 / 고메다 민숙 0920-57-0273 / 페코짱 민숙 0920-52-1716 시마모토소 민숙 0920-52-1705 / 친구 민숙 0920-52-8820 / 기라쿠나야도 민숙 0920-52-2970 센료 민숙 0920-52-4406 / 히노키산장 펜션 0920-52-1776 유스호스텔 세잔지 0920-52-0444 선박편  기사의 12번째 이미지

    항공편 김포 – 쓰시마 주 5회 / 소요시간 1시간10분 / 하나투어패키지상품 구입시에만 이용가능 코리아익스프레스에어 1588-2682

    *하나투어 대마도 에코투어 2일 39만9000원부터

    김포공항 - 18인승 TURBOPROP 1900D편 – 쓰시마공항 – 대마역사민속자료관 – 조선통신사비 – 고려문 – 덕혜옹주비 – 최익현선생 순국비 – 에보시타케 전망대 – 와타즈미신사 – 한국전망대 – 미우다해수욕장

출처 : 약초나라 (yakchonara)
글쓴이 : 산적(일송)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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