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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시절

그 시절 그 노래

by 진밭골 2022. 5. 8.

[이동순의 그 시절 그 노래]

중학교 시절을 회상하노라니 가슴부터 먹먹해진다.
격동의 1960년대 초반, 4·19를 대구의 수창초등학교(壽昌初等學校) 5학년 때 보았고, 5·16은 초등 졸업반에 일어났었다. 극장 만경관(萬鏡舘) 옆 대구경찰서 네거리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그 토치카에서 철모 쓴 병사 여럿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행인들을 쏘아보던 삼엄한 현장모습이 떠오른다.

그 이듬해인 1962년에 대건중학교를 입학했으니 이로부터 대구의 북구 태평로 경부선 철도 너머에서 남산동 언덕까지 이후 3년을 줄곧 걸어 다녔다. 첫 돌 전에 어머니 잃고 대구로 옮겨온 이농민(離農民) 가족들은 아버지와 형님, 큰 누나까지 셋이 전매청 직원이었다. 그 인연으로 수창학교 뒤편 전매료(專賣寮)에서 여러 해를 살다가 대문이 유난히 크고 벽오동이 대문 옆에 우뚝 선 태평로의 한옥을 사서 이사를 했었다. 동네에서 우리 집 별칭은 ‘큰 대문 집’이었고 나는 ‘큰 대문 집 아이’였다. 그때 태평로에서 수창학교를 졸업하고 새로 진학한 곳이 대건중학교였다.

태평로에서 학교가 있는 남산동까지 걸어가려면 우선 경부선 철로부터 건너야 한다. 차단기가 있는 원대동에 주민들이 ‘후미키리(踏切, ふみきり)’란 일본말로 부르던 건널목이 있었지만 그곳은 한참 더 돌아가는 거리라 보다 가까운 샛길을 더 좋아했다.

그 일대의 주민들은 대개 그 샛길로 다녔다. 샛길 입구까지 철둑길을 따라 걸어가노라면 마구간이 있었고, 내 친구 인걸이는 마부아들이었다. 눈이 펄펄 오는 날 인걸이네 집 앞을 지나노라면 일을 나가지 못한 조랑말이 마구간에서 푸르르 내뱉는 콧김소리와 목에 달린 방울소리, 바닥을 툭툭 긁어대는 말굽소리가 들렸다.

행인이 많이 다니는 샛길에는 만화방, 구멍가게, 오뎅집, 참기름집, 연탄집, 솜틀집, 잡화상 따위가 있었고, 떡 방앗간도 하나 있었던 듯하다. 골목길을 빠져나가면 바로 오른편이 자갈마당 재래시장으로 이어진다.(지금 이 시장은 없어졌다) 왼쪽으로는 도원동 유곽(遊廓)과 전매청이 있었고, 자갈마당 삼거리(지금은 네거리)는 항시 오가는 행인과 차량들로 붐비었다.

도원동 쪽 큰길에는 동아극장, 소표 국수 공장이 있었고, 그 맞은편 쪽으로는 삼중당(三中堂) 백화점이 있었다. 소표 국수 사장 아들 K는 초등, 중학시절의 동기였다. 워낙 부잣집 아들이라 친하게 어울리지는 못했다. 삼중당이란 이름은 원래 식민지시절 북성로에 있던 ‘삼중정(三中井) 백화점’의 명성을 빌려온 다소 큰 잡화상점이었지만 백화점 규모에는 훨씬 미치지 못했다.

일제 때 삼중정 백화점은 일본말로 ‘미나까이(みなかい) 백화점’이라 불렀는데 성씨에 가운데 중(中)이 들어가는 일본인 나까이(中井) 형제 두 사람과 나까에(中江), 여기에다 오꾸이(奧井) 등 4인이 공동출자를 해서 만든 곳으로 대구 북성로가 본점이었다. 미나까이는 그 공동출자자의 성씨에서 집자(集字)로 만든 명칭이다. 그 백화점은 개점 이후 사업이 불같이 일어서 서울과 일본 도쿄는 물론 만주의 신경(新京)까지도 지점을 둘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었다고 한다. 광복 이후 삼중정 백화점은 막을 내리고, 옛 일본인거리 북성로는 지금 남루한 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자갈마당 로터리에 예전의 위세를 본뜬 삼중당 백화점이 세워져서 그 시절을 기억하는 노년세대들에게 야릇한 정감을 불러일으켰다. 늙은이들은 대구 북성로 거리를 지칭할 때 항시 ‘미나까이 골목’이란 말이 익숙한 듯 보였다. 그 삼중당백화점 앞은 버스주차장이라 늘 혼잡했다. 남산동까지 버스로 등교를 할 수도 있었지만 차비가 없어서 나는 항상1930년대 대구북성로에 일본인이 세운 미나카이 백화점 ©이동순

골목길을 빠져나와 길 건너 동아극장 앞을 통과하면 바로 인교동으로 이어진다. 인교동 골목은 한국 최초의 영화감독 이규환(李奎煥, 1904~1982)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이규환 감독은 1932년 단성사에서 개봉한 흑백무성영화 <임자 없는 나룻배> 작품으로 제국주의 침탈을 비판하고 저항하는 영상물을 만들어 식민지 겨레의 심금을 울렸다. 이 영화에는 전설적인 배우 나운규(羅雲奎, 1902~1937)와 월북한 여배우 문예봉(文藝峰, 1917~1999)이 각각 뱃사공 아버지와 딸로 출연했다.

한편 인교동 골목 입구에는 철공소가 있었는데
철공소를 지나면 서성로 방앗간 골목이다.
그곳은 삼성의 창립자 이병철(李秉哲, 1910~1987)의 삼성상회 옛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던 거리다.

북성로에서 서성로에 이르는 긴 구간의 그곳은 각종 철공소, 철재상, 공구상, 베어링, 선반 기계 등 온갖 철물과 관련된 업체가 즐비하게 펼쳐져 있던 곳. 언제나 쇠 깎는 소리, 긁는 소리, 자르는 소리, 비비는 소리, 두들기는 소리, 용접하는 소리 따위에다 노동자들끼리 자주 싸움질하는 소란까지 잠시라도 조용할 틈이 없던 지역이다. 미군부대에서 쓰고 버린 빈 드럼통도 이곳에 오면 반듯하게 자르고 두들겨 온갖 생활도구로 다시 태어나곤 했다. 길바닥은 어딜 바라보나 오래 쩐 기름때로 얼룩져 있고, 후줄근한 작업복을 입은 일꾼들이 낮술에 취한 불콰한 얼굴로 돌아다녔다. 이 때문에 주민들은 이 일대를 ‘깡통도로’라 불렀다.

대구의 지명들은 특이하다. 북성로, 서성로, 동성로, 남성로 등의 지명들을 지금도 그대로 쓰고 있는데, 원래 대구읍성(大邱邑城) 시절에 성곽이 세워져 있던 곳이다. 그 성곽을 파괴 해체한 장본인이 바로 당시 대구군수를 지내던 친일매국노 박중양(朴重陽, 1872~1959)이다. 그는 침략의 원흉으로 통감부의 초대 통감이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의 양자로 자처하던 자였다. 가련한 식민지백성들 앞에 항시 지팡이를 휘두르며 다녔으므로 ‘박작대기’란 별명으로 불렀다. 그가 이토와 대구의 일본 거류민단 측의 비밀스런 합작으로 대구읍성 파괴해체를 주도했던 것이다.

일본인들은 성곽을 해체한 곳에 생긴 부동산을 헐값에 사들여 막대한 차익을 남겼다. 성곽 해체과정에서 나온 각석(角石)은 계성학교 본관을 지을 때 주춧돌, 밑돌로 가져가서 일부 썼고, 지금의 청라언덕에 있는 서양인 선교사 주택의 초석으로도 사용했다. 뿐만 아니라 해체 때에 나온 수천 소달구지의 흙과 자갈은 성 밖 서쪽지역의 저지대 상습침수지역으로 실어다 매립했다. 그곳은 성내에서 흘러나온 빗물이 고여서 늘 습지를 이루었고, 미나리가 저절로 돋아서 ‘미나리깡’이라 불렀다. 바로 이곳에 대구읍성의 흙과 자갈을 쏟아 부어 매립을 했는데 그로부터 이름이 ‘자갈마당’으로 불렸다.

매립 초기에 대구 거주 일본인 이와세(岩瀨)란 자가 헐값에 불하를 받아 시작한 첫 사업이 창녀촌, 즉 유곽(遊廓)이었다. 대구 ‘자갈마당’이란 말에서 곧장 유곽을 떠올리게 되는 역사적 배경엔 이런 사연이 숨어있다. 이 매춘굴(賣春窟)은 식민지의 공창시대(公娼時代)를 거쳐 해방 이후 잠시 위축이 되었다가 곧 살아났다. 6.25전쟁과 더불어 엄청난 피난민들이 무작정 대책 없이 대구, 부산으로 밀려들던 시절, ‘자갈마당’은 다시 번성한 모습으로 확장되었다.

함경남도 원산 출생의 구상(具常, 1919~2004) 시인이 쓴 <초토(焦土)의 시>는 시인이 자신의 고향친구인 화가 이중섭(李重燮, 1916~1956) 등과 더불어 대구에서 피난살이하던 시절, 자주 보던 도원동 유곽풍경과 전쟁의 비극성을 다룬 시집이다.

서성로 길엔 당시 달서천(達西川)이 흐르고 있었다.(지금은 완전 복개되어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달서천은 달성공원의 서쪽을 흐르는 하천이란 뜻이다. 앞산의 물과 대명동 영선못 쪽에서 흘러온 물줄기가 달서천을 이루고, 다시 팔달교 쪽의 금호강으로 합류해간다. 그 금호강은 낙동강으로 이어져서 더 큰 강물이 된다. 달서천 둑길을 따라 한참 올라가면 서문시장으로 이어지는 넓은 도로와 만나게 된다. 이 도로 부근 일대를 시장북로(市場北路)라 불렀다. 시장은 필시 대구사람들이 ‘큰장’이라 부르는 서문시장(西門市場)일 터였다.

시장북로 어름에 192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의 시인 고월(古月) 이장희(李章熙, 1900~1929)의 집이 있었다. 식민지시대의 주소는 ‘대구부(大邱府) 서성정(西城町) 1정목(丁目) 103번지’ 그곳에서 고월은 대구의 친일부호였던 이병학(李炳學, 1866~1942)의 아들로 태어나 자랐고, 부친과 몹시 불화하였다. 고월의 부친은 아들이 대한제국 시절 통신원 하급주사로 시작해서 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위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등 일본을 위해 전심전력으로 헌신하는 친일경력을 두루 거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아들이 조선총독부 관리가 되기를 소망했다.

고월은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가 여럿 바뀌었다. 이병학은 여러 부인과 살면서 도합 21명의 자녀를 낳았다. 일본 교토중학을 다녔던 고월은 방학 때 대구 집으로 돌아와 사랑채에 기거하면서 일절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부친에 대한 극도의 혐오 때문으로 보인다. 이상화(李相和, 1901~1943) 시인과도 비슷한 또래였지만 기질적으로 많이 달라 자주 어울리지는 않았다. 방안에 자신을 스스로 유폐시킨 채 고월은 줄곧 어항 속에 갇힌 금붕어만 빈 종이에 그렸다. 해가 저물면 집을 나와 찾아가는 유일한 곳이 남산동의 천주교 성모당(聖母堂)이었다. 고월은 성모당 풀밭에 한참토록 혼자 앉아 깊은 상념에 잠기다가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해 다량의 수면제를 삼키고 젊은 시인은 한 많은 스물아홉의 생을 자살로 마감하게 된다.

당시 나의 등굣길은 고월 이장희 시인이 다니던 산책길 코스 그대로였다. 또한 이 길은 이상화 시인이 마음 울적할 때마다 백부 댁이 있던 서성로 우현서루(友絃書樓)를 나와서 즐겨 찾아가던 앞산 밑 보리밭, 그 들판을 자주 다녀오던 바로 그 길이다. 상화 시인은 자신의 단골 산책코스이던 앞산 밑 보리밭이 어느 날부터 일본군 공병대의 군수장비로 마구 파헤쳐지고 비행장 활주로가 되어가는 처참한 광경을 보았다. 이 현장을 보고 격분의 심정으로 쓴 시가 바로 절창(絶唱)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다. 이 소상한 과정은 시인의 아우 이상백(李相佰, 1904~1966) 선생이 1962년 동아일보 신문칼럼에다 밝힌 증언으로 확인되었다.

그 일본군비행장은 1945년 해방 이후 미군비행장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아직도 대구시민들은 이곳을 미국으로부터 돌려받지 못했다. 바로 그 역사의 현장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전문을 새긴 시비(詩碑)가 건립되는 날이 오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고월과 상화가 다녔던 그 도로를 횡단해서 다시 달서천 둑길로 접어들면 좌우로 아주 힘겹게 살아가는 빈민촌이 펼쳐진다. 지붕을 짚으로 이은 초가들도 흔했다. 거기서 조금만 더 가면 왼편으로는 계산동(桂山洞) 성당의 첨탑이 보였고, 그 맞은편으로는 성당보다 더 높은 언덕에 화강암으로 지어진 제일교회의 우람한 건축물이 보였다.

그 교회 아래쪽 넓은 터에는 매우 커다란 한옥 고가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곳이 친일부호 장길상(張吉相, 1874~1936)의 집이라 하였다. 그는 경북 선산 출생으로 형조판서 장석용의 손자이며 관찰사를 지낸 장승원의 아들로 장직상(張稷相, 1883~1959), 장택상(張澤相, 1893~1969)의 형이다. 장택상은 미군정기 수도경찰청장으로 자유당정권 반공노선의 첨병이다. 장길상 형제들은 1912년 대구의 일본인 자본가들이 선남상업은행을 설립할 때 자본을 투자하여 모두 금융자본가가 되었다. 말하자면 일제와 영합하여 기회주의적 자본가로 득세할 수 있었던 친일파 세력이다.

이 장길상의 맏아들 장병천은 대중문화사에서 기억할 만한 인물이다. 여러분은 딱지본소설로 만들어진 <강명화전(康明花傳)>이란 작품을 혹시 아시는지? 대구 갑부의 아들 장병천(張炳天, 1900~1923)은 한강에서 기생 강명화(1900~1923)를 보고 사랑에 빠진다. 얼굴이 귀엽고 가무(歌舞)에 출중하던 강명화의 뒤를 장병천은 미친 듯이 따라다니는데 마침내 강명화는 장병천의 진심을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병천의 부모는 둘의 사랑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이에 장병천은 일본으로 강명화랑 함께 유학길을 떠난다. 많은 박해와 멸시, 조롱과 비판이 그들 뒤를 따라다닌다. 마침내 험난한 곡절을 이기지 못한 채 강명화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애인의 죽음으로 삶의 의미가 사라진 된 장병천도 곧 뒤따라 극약을 삼키고 생을 마감한다는 슬픈 순애보(殉愛譜). 둘의 비극적 사랑을 다룬 <강명화전>은 세간에서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한다.

이 사연을 담은 슬픈 강명화의 노래는 죽기 전 강명화의 심정을 옮긴 가사였다. 이것이 당시에 유행하기도 했다니 대단한 화제였다.

슬프다 꿈결 같은 우리 인생은풀끝에 맺혀있는 이슬 같도다무정야속 저 바람이 건들 불며는이슬 흔적 순식간에 없으리로다.
가정불화 사회책망 빗발치듯이내외협공 짓쳐드니 침식 없으니박명인생 나의 일신 관계없지만우리 낭군 만리전정 그르치겠네

바로 그 장병천이 어린 시절에 살았던 옛집을 지나서 서현교회(西峴敎會) 쪽 언덕길을 둑방 길로 곧장 올라가서 작은 다리를 하나 건너가면 바로 대건중학교 교문이 나타난다.

이동순 시인. 문학평론가. 1950년 경북 김천 출생. 경북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동아일보신춘문예 시 당선(1973), 동아일보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1989). 시집 <개밥풀> <물의 노래> 등 15권 발간. 분단 이후 최초로 백석 시인의 작품을 정리하여 <백석시전집>(창작과비평사, 1987)을 발간하고 민족문학사에 복원시킴. 평론집 <잃어버린 문학사의 복원과 현장> 등 각종 저서 53권 발간. 신동엽창작기금, 김삿갓문학상, 시와시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받음.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계명문화대학교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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