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봄, 어느 날 밤.
권대감 댁 무남독녀가 이대감 댁 맏아들과 혼례 날짜를 잡아 놓고 별당에서 바느질을 하던 중 깜빡 졸다가 등잔을 쓰러뜨려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하인들이 나오고 이웃들도 몰려와 바가지와 대야로 물만 퍼부었지 불길이 워낙 사나워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때 권대감 댁 총각집사가 바가지로 물을 뒤집어쓴 후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모두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총각집사가 혼절한 아씨를 안고 나왔다.
사흘 만에 아씨는 깨어났고 종아리에 가벼운 화상을 입었을 뿐 사지와 이목구비는 멀쩡했다. 권대감과 안방마님은 딸을 끌어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아씨를 살려 낸 총각집사도 한달여 만에 자기 방에서 나와 얼굴을 드러냈다. 그는 중화상을 입어 등과 허벅지 그리고 오른쪽 뺨과 목덜미에 화상 자국이 남았다.
그래도 그는 묵묵히 집사 일을 계속했다.
총각집사는 원래 뼈대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조실부모했는데, 워낙 영민한 덕에 훈장님 소개로 권대감 댁에 들어와 빈틈없이 살림을 꾸려 갔다.
어느 여름날 밤. 밤늦도록 장부 정리를 마치고 호롱불을 끈 후 자리에 눕는데 살며시 문이 열렸다.
총각집사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누구요?” 하자 나지막한 목소리로, “서방님의 소첩이 될 사람이옵니다.” 바로 아씨였다.
그녀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총각집사가 “아씨, 이러시면 안됩니다” 하며 말리는데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아씨가 집사의 품에 안겼다. 이튿날 아씨가 머리를 올려 비녀를 꽂고 사랑방으로 가 권대감에게 모든 걸 털어놓자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권대감이 아무리 생각해도 딸을 살려 준 은인이고 착실하고 똑똑하지만 집안도 없는 집사에게 딸을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때 꾀 많은 육촌 동생이 찾아와 기발한 묘책을 냈다. 집안 식구들을 마당에 모아 놓고 한가운데 총각집사를 세운 후 권대감이 소리쳤다.
“네가 진정 딸애를 좋아한다면 목숨과도 바꿀 용기가 있느냐?”
“네, 있습니다.” 서슴없는 총각집사에 말에 권대감이 한손에 하나씩 접은 종이를 들고, “이 두장의 종이패 중 하나는 ‘혼인’이라고 씌어 있고 하나는 ‘죽음’이라고 씌어 있다. 하나를 잡아라.
혼인패를 잡으면 너는 내 사위가 된다. 허나 죽음패를 잡으면 너는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게야!” 쩌렁쩌렁 울리는 권대감의 말이 끝나자 총각집사는 대감 오른손의 종이패를 잡아 그대로 입 안에 넣고 씹어 삼켰다.
“대감의 왼손에 잡고 계신 패를 펼쳐 보시지요. 그게 ‘혼인’이면 저는 죽음을 면치 못하겠지요.” 총각집사의 말에 대감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고는 왼손에 들고 있던 종이패를 찢으며 소리쳤다. “여봐라, 시월상달에 혼인 날짜를 잡도록 하라.” 대감이 들고 있던 패는 둘 다 ‘죽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