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65세 이상이 인구의 20%를 넘는 '초고령 사회'에 진입한 나라가 이탈리아와 독일이다. 두 나라 모두 재정 건전 국가였다. 그러나 2019년 현재 두 나라의 GDP 대비 국가 부채 비율은 독일 59.8%, 이탈리아 134.8%다. 독일은 2600조원이 넘는 천문학적 통일 비용을 지출하고도 우수한 재정 건전성을 자랑하며 경제 활력을 유지한다. 이탈리아는 만성 적자와 경제 침체에 빠져들면서 유럽의 병자(病者)로 전락했다. 두 나라 운명을 가른 것은 포퓰리즘 정치냐, 아니냐였다.
독일은 좌·우 정권을 불문하고 재정 건전성에 우선순위를 두고 국정을 운영해왔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를 겪으며 부채 비율이 82.4%까지 높아졌지만 메르켈 정부가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부채 비율을 20%포인트 이상 도로 줄였다. 독일에선 국가 부채로 미래 세대에 부담을 떠넘기는 것은 불공정하다는 국민 의식이 투철하다. 세금으로 선심 쓰는 포퓰리즘 정책이 유권자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정치 문화가 정착돼 있다. 2009년엔 신규 국채 발행액을 GDP의 0.35% 이내로 제한하는 제동 장치까지 헌법에 명시했다. 독일은 2000년대 초 저성장·고실업의 독일병을 겪을 때도 세금 풀고 빚 늘리는 손쉬운 정책 대신 노동·연금 개혁의 정공법으로 경제를 살려냈다.
그리스에 이어 유럽 2위 빚투성이 국가가 된 이탈리아는 정반대 길을 걸었다. 이탈리아는 한때 영국보다 잘사는 경제 대국이었다. 1970년대 초만 해도 부채 비율 40%대를 유지했다. 하지만 선심 쓰는 연금 제도와 현금 퍼주기로 재정이 급속도로 악화했다. 포퓰리즘은 국민을 타락시킨다. 연금 축소를 시도한 총리는 국민 저항으로 1년도 버티지 못하고 물러났다. 재정 위기를 겪고도 개혁 헌법은 부결됐다. 개혁이 불가능한 나라가 된 것이다. 국가 신용 등급은 투기 등급 직전까지 추락했다. 연금 등 현금 복지에 돈을 쓰느라 덜 급한 의료 투자는 뒷전으로 밀렸고 부실 의료의 처참한 실상이 이번 코로나 쇼크 때 그대로 드러났다.
국가의 위기는 빚에서 시작된다. 부채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빚이 빚을 부르는 '부채의 함정'에 빠져든다. 투자자들이 국채를 외면하면서 이자가 급등하고 국가 신용 등급이 떨어지면서 화폐 가치가 급락하는 위기 패턴이 역사에 반복돼왔다. 구소련의 붕괴는 재정 파탄 국가가 어떤 상황을 맞는지 보여준다. 1992년 공식 인플레이션율이 2000%를 넘었다. 자동차를 살 돈이 2년 뒤엔 초콜릿 살 돈밖에 안 됐다. 1970년대 남미 국가, 2010년 그리스도 비슷한 국가 부채 위기를 겪었다.
그동안 우리의 재정 운용은 독일과 비슷했다. 역대 정권마다 건전 재정을 국가 운용의 주요 목표로 삼았다. 1997년 외환 위기, 2008년 금융 위기를 빠르게 극복하고 2012년 사상 처음으로 일본보다 국가 신용 등급이 높아진 것도 재정 건전성 덕이 컸다. 그랬던 나라가 문재인 정부 들어 이탈리아를 닮아간다. 재정 건전성은 국정 후순위로 밀리고 대통령이 앞장서 '부채 비율 40%' 방어선을 폐기하라고 지시한다. 세금 아끼는 것이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사고방식으로 몰리고, 국민 세금 펑펑 쓰는 것이 미덕처럼 통용되며 재원은 따지지 않는 선심성 사업이 봇물 터지듯 쏟아진다. 세금으로 표를 사는 노골적인 매표(買票) 국정도 극성이다. 이번 코로나 위기 때도 피해 계층, 피해 기업 구제는 뒷전이고 정부와 정치권이 '전 국민 현금 살포'부터 앞장섰다. 이 위기가 지난 뒤 부채를 줄이려는 의지가 있는지도 의문이다.
지난달 글로벌 신용평가사 S&P가 한국의 신용 등급을 기존대로 유지하면서도 이례적으로 '균형 재정'을 강조했다. 피치도 "국가 채무 비율이 오는 2023년 46%까지 높아질 경우 국가 신용 등급에 하방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고 경고했다. 우리 국가 부채 비율은 올해 44%를 넘어설 전망이다. 적자 국채 발행이 100조원을 넘을 것이라고 한다. 매일 100만원씩 2739년을 써야 1조원이다. 그 100배를 한 해에 빚낸다니 대한민국이 이래도 되는 나라인가. 이탈리아가 독일과 비슷한 부채 비율 57%에서 121%로 2배가 되는 데 불과 14년 걸렸다. 우리는 더 짧을 수 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5/13/202005130001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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