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5년(1405)에 창덕궁을 세우면서 함께 지었는데, 지금 있는 건물은 순조 4년 (1804)에 다시 지은 것이다. 지붕 꼭대기에는 오얏꽃무늬로 장식하였는데, 이것은 한말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던 무늬이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의 2층 건물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보았을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2층의 높은 기단 위에 세웠다.
월대(月臺)의 어계(御階)는 3곳으로 분리되어 가운데를 답도(踏道)라 한다. 답도(踏道)란 왕이 밟는다는 뜻인데,답도는 계단이 아닌구름속에서 노니는 봉황의 그림이다 다시 말해서 걸어서는 오를 수 없는 곳이 바로 이 답도이다. 따라서 작은 어가(御駕)를 타고서 오르는데 좌우측의 작은 계단은 가마꾼이 다니는 계단이다. 왕이 오를 때 어가를 타고 그림처럼 봉황을 타고 구름위를 날아 답도를 넘어서 월대위에 올라 인정전 앞에 하림(下臨)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임금을 전하(殿下)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내부 천장 가운데는 한 단을 높여 구름 사이로 봉황 두 마리를 채색하여 그려 넣었다. 뒷면의 높은 기둥 사이에 임금이 앉는 의자가 마련되어 있고 그 뒤에는 해와 달, 5개의 봉우리를 그린 일월오악도 병풍이 있다.
인정전 조정(朝政)-건물 좌우에는 복도(행각)가 있고, 마당에는 임금이 다니는 길인 어도(御道)와 신하들의 지위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놓여 있다
품계석(品階石)
앞 쪽의 넓적한 '드므'는 화마가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놀라 도망친다는 속설에 따른 것이고 뒤에 있는'부간주'는 액운을 막아준다는 상징적인 물건이다.
궁중제사 때 사용하는 축문을 쓰고 향을 관리 하던 향실(香室)
인정전에서 선정전으로 통하는 문
정면의 선정전에서 왼쪽 문을 통과하면 인정전이고, 오른쪽 계단을 오르면 희정당이다.
선정전(宣政殿 보물 제814호)은 평상시 임금이 신하와 일상업무를 논하던 편전(便殿)이다. 이 건물은 광해군이 인왕산 아래에 새로 지었던 인경궁(仁慶宮)의 광정전(光政殿)을 철거한 재목을 이용하였으며, 이때의 모습이 현존하고 있다. 창덕궁에 남아 있는 건물 중 유일하게 청기와를 얹은 건물이다.
선정전 주위 마당 남·서쪽으로는 행각이 둘러싸고 있고, 선정전 정면 중앙칸 앞에서 남쪽으로 정문인 선정문까지는 사방이 트인 천랑(穿廊)으로 연결되어 있다
임금은 일월오악도를 배경으로 중앙에 앉고 그 좌우로 문관과 무관이 자리잡으며 한쪽에서는 사관이 앉아 국사에 대한 논의를 세세히 기록하였다.
앞면 3칸·옆면 3칸으로 규모가 크지 않은 1층 건물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희정당 현관 앞에서 본 선정전과 인정전. 선정전은 순조 때에 이르러 그 옆의 희정당(熙政堂)이 편전으로 사용되면서 기능이 약화되었다.
창덕궁 희정당은 원래 창덕궁의 내전에 속한 건물이었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 편전으로 사용되었다.
희정당은 1920년에 재건되면서 건물 남면에 한국 건축에 없던 밖으로 돌출한 현관이 부가되는 등 많이 바뀌었다.